모두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당신이었고, 나였던 한 영웅을 위한 진혼곡

히어로 영화가 영웅을 그려내는 방법에 대하여

정혜린 | 기사승인 2020/03/10 [13:31]

모두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당신이었고, 나였던 한 영웅을 위한 진혼곡

히어로 영화가 영웅을 그려내는 방법에 대하여

정혜린 | 입력 : 2020/03/10 [13:31]

[씨네리와인드|정혜린 리뷰어] '히어로'하면 어떤 인물이 떠오르는가? 아이언맨? 헐크? 슈퍼맨? 너무 많은 인물이 떠올라 콕 집어 답을 하기 어려운가? 질문을 던지는 나조차도 짧은 순간 동안 여러 히어로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내게 히어로를 고르라면 나는 “브이”를 고를 것이다.

 

▲ 영화 '브이 포 벤데타' 스틸컷     ©워너브라더스

 

<브이 포 벤데타>는 2006년에 개봉했던, 자그마치 14년 전의 영화이다. 제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 후 2040년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는 거리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와 녹음 장치들을 통해 철저하게 정부로부터 감시와 통제를 받는 사회를 그려낸다. 분명 지금보다도 20년 후인 미래를 그려내고 있건만, 영화 속 세상은 오히려 지금보다 20년 전도 못한 세상인 것만 같은 느낌을 준다. 기본권도 침해해버린 삼엄한 통제 속에서도 누구 하나 불만을 표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은 반감마저 자극한다.

 

이러한 사회에 단 한 명의 히어로, 브이가 나타난다. 그는 확고한 신념으로 숨죽여 살아가길 강요하는 세상에 당당하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역시 정부의 통제와 억압에 의해 만들어진 한 명의 피해자이지만, 그의 칼 끝은 결코 복수만으로 휘둘러지지 않는다. 복수를 넘어 그의 궁극적인 목표는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자신의 메시지를 전하며 혁명을 꿈꾼다. 그리고 결론적으로, 브이는 사람들을 런던 중심부로 끌어내는 데 성공했고 웨스트민스터 궁전과 빅 벤을 폭파시켰다.

 

어느 순간부터 오락 영화의 대표주자는 히어로 영화가 된 것 같다. 우리나라 누적 관객수 천만 이상을 기록했던 27개의 영화 중에 3개가 히어로 영화인 어벤져스 시리즈이며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약 1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역대 5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이처럼 히어로 영화는 탄탄한 팬층을 기반으로 끊임없이 우리에게 즐거움을 선사해주고 있다. 우리는 수십 년 동안 진화해온 다양한 버전의 스파이더맨의 여전한 친구이며, 아이언맨 슈트만 보고 몇 번째 시리즈의 작품인지 읊을 수 있다.

 

우리가 열광하고 있는 히어로 영화에서 한 인물을 영웅으로 그려내는 데는 몇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필요하다. 첫째, 히어로의 반대편에서 온갖 부당한 짓을 저질러줄 악당이 필요하다. 둘째, 히어로는 시민들을 위해 자신의 힘을 기꺼이 사용해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히어로는 초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브이 역시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히어로이다. 그러나 브이가 세상에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련의 과정은 여느 히어로와는 다른 방향성을 띄고 있다.

 

브이의 정 반대편에 서있는 존재가 정부라는 점이 그러하고, 브이가 계속해서 시민들의 참여를 독려한다는 점이 그러하다. 어벤져스처럼 외계 생명들이나 자신들처럼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악당과 싸우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물론 화려한 시각적 효과와 연출로 상상에서만 존재할 것 같던 인물들을 영화 속으로 끌어와 세상을 위해 싸우는 스토리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기에 완벽한 내용이다. 결과적으로 전 세계는 어벤져스에 열광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이런 스토리는 어디까지나 사람들의 '재미'만 충족한 채 쉽게 소비되고 만다. 외계 생명체니 초능력을 가진 악당이니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설령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존재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가상이고 “재미”를 위한 내용일 뿐이다.

 

영화 속 브이는 자신이 악당을 향해 저지르고 있는 짜릿한 복수와 반격에 대해 단 한 번도 자랑하듯 떠벌리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끝까지 또 다른 주인공인 에비에게도 가면을 벗은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브이라는 코드명을 썼던 것처럼 그는 죽는 순간까지 익명이었다. 익명의 힘은 대단했다. 그의 존재는 나비효과처럼 수많은 익명의 영웅들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비록 가면이라는 익명 하에서였지만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나섬으로써 비로소 아버지로, 어머니로, 자신으로, 그리고 당신으로 설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브이 포 벤데타>가 그려낸 영웅은 어디까지나 '익명'이다. 누구든 될 수 있고, 누구로든 변모할 수 있는 익명. 브이가 대적하는 악당은 우리 곁에도 존재하는 사람들이고, 악당이 휘두르는 힘은 얼마든지 우리에게도 미칠 수 있는 힘이다. 경외감으로 가득찬 히어로가 아니라 정말 우리 곁에 있을 것만 같은 히어로를 보며 우리는 '재미'를 넘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 냈다는 것. 이것이 <브이 포 벤데타>가 14년 후인 지금까지 사랑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여전히 사람들은 히어로를 갈망하고, 세상을 더 아름다운 방향으로 이끌어줄 누군가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기다리는 자는 결코 아이언맨이나 슈퍼맨이 아니다. 우리들은 우리처럼 현실을 살고 있으면서도 “아니”라고 말해야 할 때, 대범하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또 다른 브이면 충분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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