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와인드ㅣ임다연 리뷰어] 우리는 한순간도 혼자 살지 않는다. 우리의 주변에는 언제나 외부와 타인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것을 보고, 만지고, 듣고, 먹고, 맡는다. 오감을 사용해서 만난 바깥은 우리의 결여를 일깨운다. 우리는 바깥을 마주함으로써 혼자일 때는 알 수 없었던 결핍을 마주하게 되고, 그 공백을 메우기를 갈망하게 된다. 갈망은 인간을 고립시키지만,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는 다시 그 기원인 바깥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결핍의 기원으로 회귀한 우리는 그곳에서 ‘나’의 결핍을 마주하고, 외부로 결여를 채운다. 결국 우리가 바깥에서 마주하게 되는 것은 ‘나’이고, 바깥은 곧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기원’인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이언은 과학자이다. 그의 세계는 데이터와 증거로 이루어져있다. 그는 종교와 신, 영적인 것을 부정하고 그것을 반증하기 위한 연구를 하는 인물이다. 그와 정반대의 성격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인물 소피는 영적인 세계와 환생, 미신을 믿는 인물이다. 연구실과 집을 오가던 이언은 할로윈 파티에서 소피를 만난다. 이언은 그녀의 눈을 바라본 순간 자신 안의 결핍, 빈 틈을 느끼고 소피를 갈망하게 된다. 그런 그에게 파티에서 도망친 소피를 찾는 실마리가 되어준 것은 평소의 그라면 무시했을지도 모르는 ‘11’이라는 숫자의 반복이었고, 이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따라간 끝에서 그는 소피를 다시 마주하게 된다. 그의 결핍은 온전히 그의 바깥에 있었던 설명할 수 없는 힘과 그것을 믿는 소피로 인해 채워진다.
여기서 주목할만한 점은 이언이 연구하는 분야가 ‘눈’이라는 것이다. 눈은 그 자체로는 혼자 존재할 수 없고, 의존적이고 필연적으로 결핍을 가지고 있다. 또한 한없이 일방적인 통로이면서 동시에 양방향의 가장 중요한 매개체이기도 하다. 개인이 외부의 도움없이 자신의 눈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의 맨 눈은 오직 타인만이 볼 수 있다. 하지만 눈은 타인과 외부를 마주하는 매개체이며, 바깥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눈의 존재 자체가 무의미하다. 그래서 눈은 우리의 신체 중에서 가장 연약하고 의존적인 외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카메라를 들고 타인의 눈을 수집하는 이언은 그런 맥락에서 타인의 내부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마주하는 인물이다. 그렇게 항상 바깥을 보고 있는 그가 타인, 즉 외부를 통해 자신의 결여를 느끼게 되는 것은 사실상 시간 문제였을 것이다.
그러나 외벽을 들여다보는 이언과 타인 사이에는 언제나 카메라가 위치해 있다. 이것은 이언의 눈 역할을 대신 하면서 일면 그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소피와 첫만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이언은 인사보다도 그녀의 눈을 먼저 촬영한다. 카메라 렌즈와 정지된 프레임으로 그녀의 눈을 마주하고 그제서야 그는 인사를 건넨다. 오직 눈만 보이는 코스튬을 입은 소피와 대화하며 눈 대 눈으로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던 이언은, 인공적인 매개물을 사이에 두고 그녀의 눈을 마주할 때와는 다르게 자신의 결핍을 절감하고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타인의 눈을 피사체로 다루며 일방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눈으로 타인의 시선을 마주하고 돌려줬을 때 그는 온전한 바깥과 자신의 결여를 느낀다.
온전한 반대 영역에 위치해 있는 두 인물이 서로에게 끌렸다는 것은 반대에게 더 끌린다는 흔한 말처럼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언은 자신의 연구 목표를 종교에 대한 전면적인 반증으로 설정할만큼 반대 영역에 여전히 거부감을 느끼는데, 그런 그가 소피에게 끌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과학을 선택함으로써 그가 버리기를 선택한 모든 영역과 그 영역에 대한 결핍 그 자체를 형상화 한 인물이 소피이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인지하고 있지 못했던 바깥을 소피를 만남으로써 인지하게 되었고, 이언은 그렇게 자신의 결핍을 절감하고 소피와의 만남을 이어가게 된다. 즉, 바깥을 통해 알게 된 결핍을 채우기 위해 다시 바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소피와의 교제 기간 동안 조금씩 채워졌던 결핍은 그녀의 죽음으로 인해 다시 부각되고, 사실상 악화된다. ‘영혼의 창구’라는 말에 화를 내는 이언의 모습은 이전보다 더욱 폐쇄적으로 보인다. ‘눈의 기원’을 찾는 그의 연구가 성공하여 바깥의 영역에 들이밀 반증을 찾았다는 것도 그의 태도에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바깥은 다시금 그를 건드린다. 이언은 아들이 환생한 인물일 가능성을 보았고, 그것은 그가 억지로 끊어 내어야 했던 결핍의 원천인 소피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영화에서 환생은 ‘믿음’의 문제와 마찬가지이다. 환생의 과학적 증거, 즉 보통의 이언이 믿을만한 증거는 오직 동일한 눈 모양 뿐이다. 유전자적으로 무엇인가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환생을 증명할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증명은 오직 대상과 타인 사이의 기억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기억은 비가시적이고 매우 가변적인 형태를 띄고 있다. 증명해줄 타인이 없는 기억은 존재할 수는 있지만, 입증될 수는 없다. 또한 기억을 공유하는 타인이 존재할지라도 그것이 절대적일수는 없다. 같은 상황에 놓였던 개개인의 기억을 비교했을 때 일치하지 않는 경우는 항상 있어왔다. 흔히 기억이 개인을 이룬다고 이야기하지만, 우리를 이루는 그 토대란 이렇게 유동적이고 불완전한 것이다.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존하여 우리의 기억을 믿으며 살 수 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기억을 매개로 입증될 수 밖에 없는 환생의 존재 역시 믿음에 그 존재의 기반을 둘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증거와 데이터에 입각한 세계에 갇혀있던 이언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소피의 환생을 믿지 않는 폐쇄적인 길을 택했어야 할 것이다. 더군다나 기억에 입각한 테스트 역시 실패했기 때문에, 이언이 소피의 환생을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소피의 눈을 가진 아이를 그녀의 환생이라 믿고, 안아 들어 호텔 밖으로 향한다. 그는 아이가 소피의 환생이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고, 그로 인해 데이터에 기반한 견고한 과학의 세계는 뒤집힌다. 이언은 그렇게 바깥에 대한 결핍을 온전히 받아들인다.
스스로의 결핍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면을, 외면하고 싶은 면까지 알고 있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언은 환생에 대한 믿음을 통해 자신의 결핍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결핍의 기원이자 해결책, 즉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가장 깊은 기원을 찾아 떠나고 그것을 마주한다. 그의 삶은 그 때문에 뒤집혔을 것이고, 그것은 결핍을 직면하고 메우는 방향으로, 진정한 자신의 모습과 기원을 파악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두시간에 달하는 영화는 자신의 결핍을 마주한 인물과 그것을 통해 자신을 알아가는, ‘나의 기원’을 찾는 인물을 그린다. ‘눈의 기원(eye origins)’를 찾던 이언은 그렇게 ‘나의 기원(I origins)’를 찾는다.
보도자료 및 제보|cinerewind@cinerewind.com <저작권자 ⓒ 씨네리와인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
아이오리진스 관련기사목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