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혹한 현실을 똑바로 마주한다는 것
Review|영화 '다크 워터스'(2019)
정지원 | 입력 : 2021/02/01 [09:53]
[씨네리와인드|정지원 리뷰어] 어린 시절 내가 좋아했던 영화 속 영웅들은 언제나 혜성처럼 등장해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하고 마침내 정의를 쟁취하는 히어로 그 자체였다. 때로는 악당들과 싸우다가 궁지에 몰리기도 하지만 각성의 단계를 거치고 시원하게 부활하는 그런 멋지고 당찬 영웅들은 그들의 사랑스러운 연인과 함께 행복하고 안전한 세상에서 오래오래 살아간다는 꽉 막힌 해피엔딩을 보고 자랐다. 그래서 엔딩크레딧이 올라간 이후에도 그들이 잘살고 있을 거라는 확신을 주는 세계만을 알고 있었다.
각박한 사회라는 일종의 표현이 단순한 수식어가 아니라는 걸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할 나이가 되었을 무렵 나는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이겨내는 캔디보다는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 영웅으로 성장하는 서사를 가진 영화를 찾아보게 되었다. 몇 년째 ‘평범해도 괜찮아’, ‘힘들어도 괜찮아.’라고 집단 최면처럼 위로 중인 사회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아무튼, 이런 평범한 ‘히어로’들도 마지막에는 꼭 해피엔딩을 맞이했다. 다음 시리즈를 위한 복선으로써 곤경에 처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사뭇 다르다. 아니 정정한다. 완전히 다르다. 캔디형 히어로는 물론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악당을 무찌르는 평범한 영웅과도 전혀 다른 가시밭길을 걷는다. 러닝타임 내내 혼자 싸웠던 주인공 롭 빌럿은 마지막 장면까지도 홀로 법정에 나와 ”여전히“ 싸우고 있음을 보여주며 끝이 난다. “You're still here? (아직도 이 사건을 맡나요?)“라는 판사의 말에 ”Still here(네.)”라고 답하며 꺼지는 화면 위로는 화학물질의 남용으로 끔찍한 환경오염과 피해를 준 듀퐁사가 모든 패배를 인정하고 배상금을 지불한 사실이 흰 글씨로 떠오르고 ”아직도“ 빌럿은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문구 또한 함께 올라온다.
건강하던 가축들을 폐사시키게 만들고 인간마저 암과 백혈병에 걸리게 만든 듀퐁사의 화학물질을 고발한 롭 빌럿은 참혹한 현실을 모른 척하지 않고 마주하기를 선택했다는 이유로 길고 외로운 싸움을 시작한다. 거대 화학기업인 듀퐁사를 상대로 홀로 싸우는 동안 롭 빌럿은 주변인들의 지지는커녕 적대적인 반응을 받게 된다. 대기업을 상대하기에 걱정해야 하는 신변의 스트레스부터 그를 믿지만, 소송비용을 위해 그의 임금을 계속 삭감하는 로펌 대표, 그들을 병들게 했을지라도 그 지역의 유일한 일자리이던 듀퐁사를 몰아냈다며 적대적인 주민들 그리고 7년이라는 세월 동안 검사 결과가 나오지 않자 병들어 떠난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분풀이를 롭 빌럿에게 하는 사람들까지 그를 둘러싼 극도의 스트레스에 롭 빌럿은 쓰러지기까지 한다.
그래도 롭은 국가마저 화학물질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 시스템 아래에서 자신의 가족을 더 나아가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움을 계속한다. 더 이상 혼자만의 싸움은 아니다. 영화 초반 그에게 ‘당신만 희생하며 사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을 하는 등 지친 모습을 보여주던 그의 아내는 일상생활까지 광범위하게 널리 퍼져있는 화학물질의 위험을 확인한 후에는 그를 가장 믿고 지지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가정의 편안을 위해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하는 희생을 했던 그가 옳은 일을 위해 싸우는 롭의 위험을 함께 부담하고 든든한 지지자가 되어가는 과정을 조금 더 보여줬으면 좋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 만큼 흥미롭고 멋진 인물이었다. 주인공을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걸 이겨낸 영웅처럼 비추는 과정이 오히려 평범한 관객들에게 무력감을 줄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자본을 등에 업은 화학물질의 남용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위협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업 영화라는 아주 큰 의의가 있는 영화였다.
누군가는 이 영화를 보고 개인이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시련을 겪을 것이라고 포기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라고 믿는다. 영화 <매트릭스>(1999) 속 빨간약을 집어삼키는 사람들처럼, 그런 사람들이 모여 사회를 바꿔나갈 수 있을 것이라 낙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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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sted 2021.02.01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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