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냥꾼이자 사슴인 삶

토마스 빈터베르그, 「더 헌트」

조윤정 | 기사승인 2022/01/06

사냥꾼이자 사슴인 삶

토마스 빈터베르그, 「더 헌트」

조윤정 | 입력 : 2022/01/06 [10:15]

[씨네리와인드|조윤정 리뷰어사냥의 원리란 생각보다도 더 간단하다. 엽총을 가지고 목표로 한 사슴을 지켜보다 때가 되면 숨통을 끊으면 된다. 숨통은 서서히 끊을 수도 있고, 단숨에 끊을 수도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사냥할 때는 사슴의 입장과 처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제목 자체인 「The Hunt」. 즉 사냥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비중이 작다. 그러나 러닝 타임 내내 관객들은 주인공인 루카스가 혹은 관객 자신도 사냥감이 되어 쫓기는 느낌을 받게 된다. 사냥이라는 제목이 이토록 상징적인 영화다.

 

친절한 유치원 교사였던 ‘루카스’는 아동을 대상으로 한 성 학대 누명이 씌워진 채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는 이전까진 누구에게도 미움받지 않으며 친절한 유치원 교사로서의 삶을 살아왔지만, 이웃들은 한순간에 그를 멸시하고 폭행한다. 빈터베르 감독은 성 학대 범죄자를 수사하는 과정이나 형량에 대한 법정 공방 대신 사람들의 기억이 어떻게 조작되고, 잘못된 믿음이 개인의 삶을 얼마나 파괴하는지에 대해 내밀하게 그려냈다. 그 덕분에 덴마크의 외딴 마을에서 일어나는 참극임에도 우리에겐 이토록 생경하다.

 

▲ 영화 <더 헌트>(2012) 스틸컷. © 엣나인필름 

 

우리는 루카스의 결백함을 알고 있다

 

영화는 루카스와 그의 오랜 친구들이 다이빙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친구 한 명이 강물에 빠져 쥐가 나고, 이를 둘러싼 사람들은 손뼉을 치며 쇼를 보듯 감상한다. 아무도 그를 구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오로지 루카스만이 강물에 뛰어든다. 이때, 루카스가 강물에 홀로 빠져있는 친구에게 다이빙하는 장면은 꼭 무리에서 소외된 사슴에게 다가가는 것처럼 보인다. 꼭 복선처럼 루카스는 가정에서 방치된 클라라에게 마땅히 베풀어야 할 친절을 베풀었고 그는 곧 무리에서 떨어져 소외된 사슴이 되고 만다.

 

『더 헌트』는 「스포트라이트」나 「다우트」 등 아동 성 학대를 주축으로 다룬 영화들과는 결이 다르다. 이 영화는 성 학대에 대한 수사나 성 학대 피해자의 트라우마를 소재로 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영화는 처음부터 루카스가 결백하다는 사실을 밝힌다. 사건의 진상을 영화 가장 초반부에 배치해서, 관객들을 루카스의 억울함에 충분히 이입하게 했다. 루카스는 성 학대를 저지르지 않았다. 사건의 원인은 ‘클라라’를 방치한 가정, 클라라에게 성적인 사진을 강제로 보여준 아이들. 그리고 클라라의 충동적인 거짓말 때문이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부정하고자 한다. 처음엔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믿음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믿음에는 이유가 없어지고 맹목성만이 더해진다. 러닝타임 내내 답답한 마음이 들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과연 비슷한 일이 주변에서 일어난다면, 과연 우리는 마을 주민처럼 행동하지 않을 자신이 있을까. 그 누구도 쉽게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 영화 <더 헌트>(2012) 스틸 컷.     ©엣나인필름

 

불가항력으로 방관자가 되고 마는 관객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하고 정적인 연출로 진행된다. 음악이 많이 사용된 영화는 결코 아닐뿐더러, 대사의 양 역시 크게 많지 않다. 결국, 영화를 가득 채우는 것은 인물들의 시선이다. 루카스의 충격받은 시선. 그리고 루카스를 훔쳐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들. 시선을 담아내기 위해 영화에서는 주로 루카스의 클로즈업과 이어지는 인물들의 클로즈업 샷이 많이 나온다. 장면의 호흡 역시 보통 긴 것이 아니다. 영화의 초반부에는 자연 풍경이나 루카스와 클라라가 걸어가는 장면들이 길게 잡힌다면 후반부에는 루카스를 보는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매우 길게 잡힌다. 영화는 이러한 대비를 이용해서 루카스의 평화가 깨졌다는 사실에 힘을 싣는다. 관객들은 불가항력으로 또 다른 루카스가 되고, 동시에 방관자가 되고 만다.

 

방관자인 관객들에 비해 루카스의 상징은 의심할 여지 없이 사슴이다. 그것도 사냥꾼의 총에 겨눠진 사슴. 영화 내내 사슴이 등장하는 것도 그 이유다. 루카스는 영화에서 쉴 새 없이 목을 긁는다. 목은 가장 취약한 부위이며, 목을 물어 질식시키는 일은 맹수들의 사냥법이다. 영화의 배경은 가을을 지나 겨울. 겨울에는 사냥할 사슴이 없으니 마을 사람들은 대신 루카스를 사냥한다.

 

▲ 영화 <더 헌트> (2012) 스틸 컷.     ©엣나인필름

 

뒤틀리는 믿음과 기억

 

「더 헌트」의 이야기는 한 아동학자의 서류에서 시작됐다. 서류에는 아이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던 것을 존재한다고 이야기하는 증상이나 넘치는 상상력으로 인해 만들어진 거짓말들에 관해 서술되어 있었다. 서류를 기억하고 있던 감독은 노르웨이에서 일어난 청소년 대상의 총기 난사 사건을 마주하며 제작을 확정하게 된다. 영화 속에서 루카스에게 처음으로 누명을 씌운 유치원 원장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얘기한다. “아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죠.” 참 당연해 보이는 문장이지만 당연하지 않다. 루카스의 파멸은 바로 이 당연함에서 시작됐기 때문이다. 바로 잘못된 믿음 말이다. 믿음이란 입체적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이 자신을 지켜볼 것이라 믿으며 삶의 희망을 얻는 사람이 있는 한편, 잘못된 신앙심을 갖고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들이 있다. 어른들은 아이가 거짓말을 할 리 없다는 단정을 지은 채 클라라와 루카스를 대한다. 믿음엔 전염성이 있는지라 마을 전체가 루카스를 배척시키는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 아니, 의심할 수가 없었다. 처음에는 믿지 않던 루카스의 여자친구마저도 마을 사람들의 증언을 듣고 의심하게 됐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마을 사람들의 의심 탓에 결국 대부분의 무고한 사람들이 피해를 받았다는 사실이다. 루카스의 삶이 파괴되었음은 물론이오, 기르던 강아지 역시 마을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심지어는 유치원 원장의 부주의함 탓에 클라라의 어머니 역시 눈물을 흘리며 학부모회를 떠나게 된다. 결국 정의구현이라는 명목 아래에 개인을 향한 집단적 분노 해소가 자행된 것이다. 그렇다면 왜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은 걸까? 더 쉽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어린아이를 의심하는 것보다는 아이들에게 유독 친절한 유치원 교사를 몰아가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쉬운 것을 택한 어른들은 결국 죄책감을 느끼는 클라라에게 세뇌하는 지경까지 이른다. “그날의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한 거지. 하지만 실제로 일어났어.” 어머니의 진심이 더욱 소름 돋게 다가오는 이유다.

 

믿음만큼이나 주관적인 것이 기억이다. 아동 성 학대를 다룬 영화인 <스포트라이트>에서는 기억을 이용한 유년기의 트라우마 진술만을 이용해 혐의를 입증하는 장면이 나온다. 반대로 말하자면, 트라우마 기억이 아닌 일반 기억은 얼마든지 왜곡될 여지가 있다는 얘기다. 학부모회에서 유치원 원장은 성 학대 후유증에는 야뇨증이나 두통, 악몽을 꾸는 증상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일반적인 아동에게도 나타날 수 있는 증상이다. 그 때문일까, 마을의 다수가 꼭 세뇌된 것처럼 후유증을 호소하고 아이들은 존재하지도 않는 루카스의 지하실을 봤다고 증언한다. 말 한마디로 기억이 뒤섞인 것이다. 감시의 처벌 저자 미셸 푸코는, 우리의 언어와 관념 모두가 지배적인 사회 권력에 영향받았다고 주장한다. 사회에서 유리된 개인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인간을 구성하는 믿음도, 기억도 성찰과 반성 없이는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 영화 <더 헌트> (2012) 스틸 컷.     ©엣나인필름

 

돌 던지는 재미

 

루카스가 범죄를 저질렀는지는 끝까지 궁금해하지 않으면서 개인의 삶을 파멸시키는 모습들. 결국 사슴의 처지에서 사냥당하는 루카스의 모습이 비단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라 더욱 소름 돋고 씁쓸했다. 현대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냥이란 늘 이런 식이다. 피해자는 영원히 낙인찍혀 살아가지만, 가해자는 대개 불분명하다. 이러한 참극은 도대체 왜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일까?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군중심리다. 군중심리란 타인의 언동에 따라 움직이는 상태를 의미하는 사회심리학 용어다. 이는 규격에 맞지 않으면 틀린 것이라고 인식하게끔 하는 사회적 분위기나 무조건 다수가 인정하는 진리가 옳을 것이라는 편견에서 시작된다. 군중심리의 정의만 들여다본다면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으나 꼭 그렇지만은 않다. 지하철 사고가 났을 때 시민들이 모두 지하철을 밀어 승객을 구조한 “신당역의 기적” 사건, “아이스 버킷 챌린지”와 같은 SNS를 이용한 수많은 참여형 사회 운동 등등. 다수의 선택에 따른 행동이 긍정적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경우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군중심리는 주로 개인의 특성을 소멸시키고 사람들을 동질화시킨다.

 

루카스의 혐의가 불분명해진 상태에도, 마을 사람들은 루카스의 창문에 돌을 던지고 그를 배척한다. 슈퍼마켓에서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루카스를 보는 클라라의 가족들은 석연찮은 감정을 느끼지만, 막상 나서서 도와주진 않는다. 이는 클라라의 가족들을 포함한 마을 사람들이 이미 루카스를 성범죄자로 낙인찍었기 때문이다. 만일 루카스에게 혐의가 없다면 자신들의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기에, 그들은 더욱 맹목적으로 루카스의 혐의를 맹신한다. 한 번 찍힌 낙인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모든 오해가 풀린 뒤 사람들이 전부 루카스를 환대하지만, 루카스가 당한 폭력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군중 심리와 낙인이 빚어낸 참극은 곧 세일럼의 마녀재판과도 연결된다. 마녀는 악하다는 사회적 풍조 탓에 군중은 개인에게 무수한 고문을 가했다. 사실, 고문당해 죽어간 마녀 혐의자보다도 더 ‘마녀’에 가까운 건 허상에 사로잡혀 돌을 던지던 군중일 것이다. 이후 마녀재판에 참여했던 판사들은 그 당시 자신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녀 ‘사냥’의 기저에 깔린 것이 인간에 대한 종교적이고 경제적인 혐오 정서였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이러한 마녀사냥은 자주 발생하곤 한다. 대표적으로 SNS의 익명성에 기인한 폭력. 즉, 악성 댓글과 신상털기가 있다. 특히 이런 행위들은 연예인과 관련된 기사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네티즌들의 무분별한 정보 수용과 몰아가기 탓에 최근 대부분의 포털 사이트 연예 기사에는 댓글 창이 사라졌다. SNS 속 마녀사냥의 피해자는 종종 다가가기 힘든 연예인이거나 소수자라는 사실을 미루어보면 사냥의 본질은 더욱 추악해진다. 맹목적인 믿음과 군중 사이에서, 17세기 말 세일럼에서는 마녀가 화형 당했고, 21세기 덴마크에서는 아동 성폭행범이 사냥당했으며, 도마 위에 오른 한국의 유명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사냥의 원리는 늘 간단했다. 사건 역시 항상 동일하게 서술되며 끝을 맺어 왔다.

 

▲ 영화 <더 헌트> (2012) 스틸 컷.     ©엣나인필름

 

마지막 총성과 남겨진 사슴들

 

빈터베르 감독은 러닝 타임 내내 관객들에게 질문한다. 과연, 영화 속의 마을만이 사냥터인지, 현실의 사회 또한 마음만 먹으면 사냥터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영화는 루카스의 아들이 사냥 자격증을 받는 날 마무리 된다. 돌이켜보면, 루카스에게도 엽총이 있었고 그 역시 사슴을 사냥해 본 적 있다. 우리는 누구나 사냥꾼이자 사슴인 삶을 산다.

 

사실 영화에는 두 가지 결말이 있었다. 루카스가 누군가의 총에 맞아 죽는 또 다른 장면이 있었지만, 감독은 고의로 루카스가 총알을 빗맞게 했다. 스쳐 지나간 총알 하나 때문에 루카스는 평생 공포에 떨 것이다. 지금도 사슴 탈이 씌워진 누군가는 스스로, 혹은 남들에 의해 숨통이 끊어진다. 어디에서나 일어나지만, 결국 어디에서도 일어나지 않는 사냥을 멈추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기억을 의심해보는 일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탕!’ 하고 총소리가 들려도 쏜 사람은 사라지고 표적만이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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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윤정
씨네리와인드 미디어본부 객원취재팀 기자단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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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2.01.06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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