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와인드|이서현 리뷰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저스트 룩업”과 “돈 룩업” 이라는 구호로 사람들이 양분화되어 갈등하는 시퀀스겠다. 하늘 위에 떡하니 위치한 혜성을 바라보지 말라는 '돈 룩업(Don't Look Up)' 운동은 정치인들과 기업인들이 사람들을 선동한 결과였다. 그러나 “돈 룩업”을 지지(?)자들은 역설적으로 “저스트 룩 업” 운동의 주동자들이 혜성에 대한 공포심을 조성해 이를 정치적으로 활용한다고 믿는다. 영화상에서 “돈 룩업” 지지자들은 자명한 팩트를 무시하는, 탈 진실에 중독된 사람들로 묘사된다. 그들의 행태는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식을 내지르게 만든다. “아니... 어떻게 저리 바보 같을 수가.”
▲ '돈룩업' 스틸컷. © 넷플릭스(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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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주의에 대한 비판?
기후위기에 대한 우리의 대응을 비추는 거대한 비유로서, 영화 『돈룩업』은 미국 사회 전반을 신랄하게 풍자한다. 코미디 장르답게 웃음도 놓치지 않는다. 러닝 타임 내내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을 만큼 흡인력도 높다. 하지만 수많은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은 있다. 영화를 보는 중에는 서사에 매혹돼 그 아쉬움을 알아차리기 쉽지 않다. 영화에 대한 아쉬움은 영화를 관람하는 도중이 아닌, 쿠키영상까지 다 보고 난 뒤에 스멀스멀 올라온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마주하면서, 관련 리뷰들을 찾아볼 때였다. 영화의 리뷰들은 대개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독자들에게 촉구하거나, 영화 속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그리고 학자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사회의 현실을 통찰하는 내용을 다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재미있게 읽어가던 중, 당혹스러운 리뷰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상대주의가 횡행하는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리뷰였다. 상대주의는 절대적으로 올바른 진리란 있을 수 없고 올바른 것은 그것을 정하는 기준에 의해 바뀐다고 주장하는 철학 사조다. 그래서 상대주의는 모든 주장이 특정 사회적 맥락에서는 진실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모든 주장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해당 리뷰는 영화<돈 룩업>이 모든 사안에 상대주의를 들이미는 우리 사회 전반을 비판하고 있다고 말한다. 더불어 상대주의의 근간인 존중의 가치를 우리 사회에서 줄여나갈 필요가 있다는 급진적 얘기도 덧붙인다. 존중이 난무하는 사회가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 하나만으로 “돈룩업”을 외치는 대중들을 양산했다는 것이다. 존중의 가치가 팩트의 가치를 넘어서면서 우리 사회가 올바른 진실을 좇지 못하게 됐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최근 젊은 층들을 중심으로 유사한 담론이 대두되고 있는 것을 고려한다면, 그렇게 어색하고 뜬금없는 해석의 방향은 아니다.
영화 『돈 룩업』 속 상대주의와 존중의 필요성
그런데 그 리뷰의 말과 같이, <돈 룩업>은 정말 '상대주의'와 '존중'의 무효용성을 피력하는 영화일까? <돈 룩업>에서 지구가 파멸을 맞이하게 된 과정을 따라가보자.
혜성에 의한 종말 시나리오를 막을 기회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러나 미국 대통령으로 대표되는 정치인들은 정치적 이익을 우선시함으로써 전 지구적 위기를 자초했다. 선동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는 데만 집중했다. 언론인들은 조회 수 늘리기에 혈안이 돼, 중요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본분을 저버린다. 기업인들은, 공동체 이익 증진이라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챙기는데 급급하다. 여기까지는 익숙한 내용이다. 보다 주목해야 될 지점은 영화 속 정치인, 언론인 그리고 기업인이 보여준 행동의 근간에, 공통분모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 '돈 룩업' 스틸컷. © 넷플릭스(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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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통령은 민디 박사와의 첫 대담에서 혜성 충돌 시나리오를 가벼이 여긴다. 지금까지 지구 종말 시나리오는 수도 없이 많았고 대다수는 기우에 불과했다는 이야기를 꺼내면서,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의 주장도 그 중 하나일거라 말한다. 자신들이 가진 신념과 관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타인의 의견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나아가 학벌을 운운하며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의 주장이 신빙성 떨어진다는 말도 한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은 일체 찾아볼 수 없다.
민디 박사와 디비아스키는 정치인들에게서 희망을 찾지 못해, 언론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유명 tv 토크쇼 ‘더 데일리 립’에 출연한 이유다. 그러나 ‘더 데일리 립’ 진행자들은 조근조근 말하는 민디 박사와 달리 사태의 심각성을 격정적 어조로 피력하는 디비아스키를 향해 미디어 교육이 필요하다는 둥 왜 이리 급발진하냐는 둥 태도를 문제 삼는다. 언론인의 기본 원칙인 인터뷰이(interviewee)에 대한 존중은 없었다. 그들이 보인 존중 부족은 사태의 심각성을 희화화하는 방식으로 발현돼, 언론의 엄중한 비판 기능을 스스로 무너트린다. 언론계에 존중의 가치가 부족하다는 것은 발기를 어떻게 표현할지만을 고민하는 기자와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기 싫어한다고 얘기하는 ‘더 데일리 립’ 진행자 브리의 모습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기업인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혜성의 궤도를 바꾸기 위해 시작된 로켓발사 프로젝트를 중도 취소시킨 뒤, 배쉬 사 대표 피터는 복잡한 첨단 기술을 활용해 혜성 충돌 시나리오를 막을 수 있다 주장한다. 나아가, 혜성에 있는 광물들을 자원으로 활용할 수 있다고도 말한다. 그러나 피터는 첨단 기술의 오작동 가능성을 제기한 배쉬 사 과학자들을 모조리 해고시킨다. 민디 박사도 그 중 하나였다. 민디 박사는 교차검증을 통해 배쉬 사 계획의 실효성을 확인해보자 제안하지만, 피터는 민디가 고독사할 것이라는 인격 모독적 발언을 하며, 민디 박사의 주장을 무시해버린다. 알고리즘과 과학적 신념에 매몰되어 타인의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 '돈룩업' 스틸컷. © 넷플릭스(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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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이 부재한 담론들 속에 익숙해진 대중들도 동일한 패턴을 보였다. "저스트 룩업"과 "돈 룩업"으로 첨예하게 대립할 때, 양 측 모두에겐 반대 논리를 존중하려는 시도가 없었다. 물론 영화 속 “저스트 룩업”은 소위말해 팩트를 바라보자고 주장한 정상인들에 해당한다. 그들에게 비정상적인 신념을 갖고 있는 "돈룩업"지지자들을 존중하라고 말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제언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우리가 전지적 시점에서 영화를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에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얘기다. “돈 룩업”을 외치던 사람들이 영화 상에서 반대로 "저스트 룩업"을 외치는 사람들을 비 정상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화 속 "돈룩업" 지지자들도 나름의 근거들을 갖고 "저스트 룩업" 지지자들을 비정상으로 봤고, 제 3자의 입장이 아닌 영화 속 당사자 입장에서 본다면, 대립되는 두 세력이 주장하는 내용들 중 어느 것이 팩트인지 가리기는 매우 어렵다. 현실세계에서 하나의 이슈를 가지고도 수많은 정보와 의견이 쏟아져 나오고 그 중에서 정확한 팩트를 가려내기가 힘든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이한 입장차를 조율하는 과정을 거쳐, 진짜 팩트와 진실을 가려내는 방법론이 필요하다.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화와 합의를 시도했다면, 저스트 룩업 지지자와 돈 룩업 지지자들은 함께 혜성의 존재를 인정하는데 이르고, 혜성 충돌을 막기위해 힘을 모았을지도 모른다.
결과적으로, 지구상에 누적된 비상대주의적 태도들은 지구 종말을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영화 「돈룩업」은 이처럼 오히려 존중의 태도가 부재한 사회상을 근본 원인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돈룩업>이 존중을 바탕으로 한 상대주의적 태도를 “지양”해달라고 호소하는 영화라 말할 수 있을까.
▲ '돈룩업' 스틸컷. © 넷플릭스(Netfl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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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룩업>이 아쉬운 이유
영화를 두고 이러한 오해가 나오게 된 배경을 고민하다보면, <돈 룩업>이 택한 서사 구조를 탓하지 않을 수 없다. <돈룩업>의 아담 맥케이 감독은 할리우드식 기승전결을 꼬면서도 영화적 완성도를 유지할 줄 아는 감독이다. 그 비결은 전형적인 서사구조를 유지하는데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선악구도를 상정해 놓고 이야기를 풀어낸다. <돈룩업>에서도 인물들이 종종 입체적으로 그려지긴 하지만, 큰 틀에 있어서 프로타고니스트와 안타고니스트의 위치는 바뀌지 않는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서사적 안정감을 느끼고, 높은 완성도를 체감한다. 계속적으로 언급하는, 저스트 룩업과 돈룩업으로 양분되는 시퀀스에서도 영화는 엄연히 선과 악을 상정해 놓는다. 저스트 룩업을 선으로, 돈 룩업을 악으로.
그러나 선악구도를 상정하는 방식은 최근의 영화들에서 지양되고 있는 추세다. 그 이유는 현대 사회가 지니는 복잡한 맥락과 사회상을, 생략을 통해, 단순명료하게 간추려버리기 때문이다. 단편적 구도를 상정한 영화를 본 관객들은 사안에 대한 단편적인 시선만을 갖게 되고,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진실”과 자연스레 요원해진다. 즉, <돈 룩업>에서 상대주의와 존중의 태도에 대한 비판만을 읽게 된 것은 <돈 룩업> 서사 구도 자체가 선악 구도로 상정돼 있어, 관객들이 영화로부터 단일한 시선만을 얻었기 때문이다. “명백한 진실을 두고 이를 애써 부정하는 바보 같은 사람들이 있다”는 담론 말이다. 영화에서 새로운 시각과 거꾸로 보기는 없다. 관객들은 악에 해당하는 이들을 욕하고 선에 해당하는 이들을 불쌍히 여길 뿐. 그렇게 영화에 대한 생각에 마침표를 찍어버린다. 영화 리뷰에 대한 아쉬움에서 영화 자체에 대한 아쉬움으로 필자의 생각이 나아갔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흥미로운 비유로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일관성 있게 풀어냈다는 점에서 <돈 룩업>은 주목받아 마땅한 영화다. 그렇기에 영화의 가치를 폄훼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다채로운 시각의 공존을 통해, 관객들의 생각의 폭을 넓히고, 생각의 깊이를 만드는 영화가 그리운 이유는 분명 있다. 단순히 한 차원 높은 비유로 흥미를 유발하는 영화들이 결코 가질 수 없는 깊이. 그게 그립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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