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와인드|이서현 리뷰어]
전쟁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예상됐던 암살 장면도 없다. 남북 전쟁의 생생한 재현을 원했던 관객들이라면 실망감에 불평을 내던질지 모르겠다. 그러나 분명한건, 스필버그 감독이 직접 말했듯, 영화 <링컨>의 목적은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를 충실히 담는 데에 있었다는 것이다.
내러티브와 신념에 충실한 영화
화려한 영상미가 영화계의 대세로 자리 잡은 상황에서, 스필버그는 영화<링컨>에서 역설적으로 내러티브와 신념을 다뤘다. 더욱이 스티븐 스필버그가 영상 이미지에 심혈을 기울이는 대표적인 감독 중 하나라는 점에서, 이와 같은 선택은 꽤나 놀랍다. 모든 일엔 트레이드 오프가 있듯, 스필버그가 황홀한 영상미를 포기하면서, 영화<링컨>은 그만한 새로운 가치를 내포하게 됐다. 바로 진정성이다. 영화 <링컨>은 화려한 영상미와 양식적 표현들을 포기한 덕에, 링컨이라는 인물과 수정안 통과 과정의 내막을 솔직하고 진실 되게 담을 수 있었다. 흥행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영화 <링컨>을 유의미한 시도이자 성공적인 도전이라 평가하는 이가 많은 이유다. 아마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러한 선택을 밀고 나갔던 배경에는 링컨이라는 인물이 가볍게 소비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링컨은 미국인들에게 노예해방을 선언한 대통령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 속 딜레마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이 영화<링컨>에서 신념과 딜레마에 집중했다고 말을 한 만큼, 영화자체에 대한 이야기보다, 영화 속에서 다룬 딜레마들에 대해 논해보고자 한다. 영화에서 가장 가시적으로 포착할 수 있는 딜레마는 바로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하는가?”이다.
영화 속 링컨은 전쟁 중에 노예해방을 선언했지만, 수정헌법 상에 노예제 폐지를 기록하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숱한 반발에 막혀서다. 평등과 자유에 입각해 발의된 수정안이라 하더라도, 수 백년 간 쌓여온 차별의 역사와 인식을 단 한 번에 청산하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미 전역이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 역시 걸림돌이었다. 남부의 농업중심 경제체제는 노예제 없이 운영 불가능했다. 노예제 폐지를 강행한다면 남부의 반발이 예상돼, 남북통일의 대의 역시 안개 속으로 빠질 공산이 컸다.
무수한 제한사항 앞에서 링컨은 이들을 뚫고 나가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옳다고 믿어서다. 그리고 목표 실현을 위한 우회로를 설정했다.
수정안 통과를 위해선 하원 의원 2/3이상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 공화당원들이 기적적으로 전원 찬성표를 던진다 해도 민주당 의원들의 찬성이 없는 한 수정안 통과는 불가능했다. 민주당원을 설득해야만 하는 필연적 상황에 놓인 것이다. 링컨이 상황을 타개해나가기 위해 택한 방법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설득의 방식이 아니었다. 원색적이면서도 노골적인 비도덕적 방식이었다. 링컨과 그의 측근들은 민주당원들의 니즈를 파악해, 요직을 약조하거나 금전적 뒷돈을 주는 식으로 하나하나 찬성 측으로 끌어들였다. 일종의 뒷거래를 활용했던 셈이다.
교묘한 팩트 왜곡을 통해 여론을 유리하게 견인하기도 했다. 남부 진영과의 평화협정이 임박했다는 정보가 새어나가면서, 민주당 진영이 “남부 세력이 평화협정을 위해 워싱턴에 왔으니 한시 빨리 노예제 수정안을 유예해야 한다”고 거세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앞서도 언급했다시피, 남부 사람들이 노예제 폐지를 반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링컨은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을 적은 메모를 의회에 전달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남부가 평화협정을 위해 링컨을 찾아온 건 사실이지만, “워싱턴”에 왔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물론 링컨은 평화협정 임박과 관련한 내용은 메모에 적지 않았고 “워싱턴에 왔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는 내용만을 적었다. 링컨의 팩트 왜곡으로 민주당 진영의 주장은 묻히게 되었고, 결국 수정안 논의가 재개될 수 있었다.
링컨은 만들어진 위인인가
현대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영화 속 링컨의 접근방식은 비도덕적인 동시에 탈법에 가까웠다. 타협과 합의라는 정치의 기본 전제를 무시한 방법이기도 했다. 아무리 고귀하고 정당한 목적을 위해서 행해졌다 할지라도, 부당한 수단을 활용한 링컨의 방식은 정당화되기 쉽지 않다.
철학자 클리퍼드는 하나의 예를 들어가며 수단이 목적에 의해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설파했다. “도둑의 절도는 단순히 사회적 재산 손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회를 도둑의 소굴로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지양돼야 한다.” 불법적 수단의 방치는 도덕적 합의의 기준을 무너트려 사회 전체의 혼란을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불법적 수단을 결코 용인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로 본다면, 링컨의 노예제 폐지 과정은 목적으로만 합리화 될 수 없다. 수단의 적법성을 무시하고 목표를 이루었던 사실 자체가 후대의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정당화 논리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링컨은 그 자체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위인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링컨의 업적을 부적법한 수단을 활용했다는 이유만으로 폄하하기엔 뭔가 꺼림칙하다. 링컨의 위인전은 여전히 우리네 아이들의 책장 가장 위 칸에 위치해 있지 않은가? 반대 논리 역시 찾아볼 필요가 있다.
링컨은 존경받아 마땅한 위인인가
사실 조금만 관심을 투자해도,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 사례를 역사책에서 수도 없이 찾을 수 있다. 국내 역사만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 시대의 급진파 독립 운동가들은 매번 유혈사태를 수반하며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다. 지금의 관점에서는 테러리스트나 다름없다. 해방 이후 독재정권이 들어선 뒤에 발발한 민주화 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해외라고 다를까. 해외에도 피로 얼룩진 혁명은 많았다. 미국 독립운동, 프랑스 대혁명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모두 하나같이 적법한 수단을 생략한 채 목적을 성취한 사례에 해당한다. 그렇지만 우리 사회는 해당 역사들을 부당한 역사로 기억하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언급한 모든 사건들은 기본권이 억압받는 시대에서 이뤄졌고, 적법한 절차를 통해서 걷어낼 수 없는 제도적 모순을 바꾸기 위해 불가피하게 부적법한 수단을 활용한 사례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는 인간의 기본권 보장 목적에 부합하면서도 적법한 수단으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경우에 한해, 부적법한 수단을 정당화해왔다.
링컨의 사례도 이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링컨이 살아온 시대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기본 값이었다. 인간의 기본권이 존중받지 못하는 시대였던 것이다. 더불어 수 백년 간 쌓여온 차별적 문화로 인해, 흑인들은 자유를 누릴 수 없었고 적법한 수단을 거쳐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단적으로 흑인들은 기본적인 교육권조차 보장받지 못했다. 흑인들의 자유를 되찾고자 했던 백인들 역시 적법한 수단으로 흑인들의 자유를 보장해주기엔 한계가 있었다. 당대 미국의 의회 시스템은 과반수 이상의 “동의”를 전제로 제도를 바꾸도록 허용했기 때문에, 근본적인 차별적 문화의 뿌리를 근절하지 않는 이상, 제도 개혁은 요원했다.
딜레마에 대한 답?
반대 논리로 링컨의 업적을 바라보니, 한결 마음이 놓이는 결론이 도출되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논란과 반박의 여지는 남아있다. 과거의 사례들만을 근거로, 링컨의 행동들이 무조건적으로 정당화 될 수 있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링컨 같은 인물이 등장해 동일한 방식으로 고귀한 목적을 이룩했다면 과연 우리는 박수 치며 그의 업적을 칭송하기만 할 수 있을까? 분명히 어려운 문제다.
결국 우리가 함께 도출해낼 수 있는 유일한 결론은 “정답은 없다” 뿐이다. 질문에 대한 최종 답은 이 글을 읽는 독자 개개인에게 달려있다. 문득 그런 생각도 든다. 아마 각자가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해보고 각자가 상이한 답을 만들어내길 바라는 마음에서, 스필버그 감독은 영화<링컨>을 만든 게 아닐까. 영화는 단순히 역사 고증, 이야기 전달에 그치지 않고 관객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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