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리와인드|임다연 객원기자] 우리의 ‘이름’은 타인에 의해 부여된 것이다. 스스로 이름을 선택하는 경우는 드물고, 보통은 ‘나’ 혹은 ‘무엇’이라고 불리는 자아와 정체성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름’이 부여된다. 정체성에 있어 뒤집힌 선후 관계는 그렇기 때문에 그 주인을 짓누르거나 가두는 형태를 보이기도 한다. 어린 시절 이름으로 놀림을 받은 경험 때문에 성격이 변화하는 것처럼, 가볍게든 무겁게든 주인의 삶에 이름이 영향을 미치는 경우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영화 ‘헤드윅’의 등장인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헤드윅’과 ‘토미 노시스’는 그들의 정체성에 우선하여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렇게 부여된 그들의 이름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그들 삶의 상징이 된다.
먼저 ‘헤드윅’은 그가 루터와 동독을 떠날 때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이름이다. 미국으로 가기 위해 여성이 되어야만 했던 그의 상황처럼, 이름 역시 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부여되었다. 루터의 젤리를 받아 든 이후로 그의 상황은 스스로 선택할 새도 없이 마치 헤드윅의 노래처럼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심지어 어머니마저도 상황에서 그를 구제하지 않은 채로, 사랑이라는 말에 현혹된 어린 한셀은 ‘헤드윅’의 삶으로 떠밀리고 만다.
발음대로 적으면 ‘Headwig’, 이를 다시 직역하면 ‘머리가발’이라는 의미를 가진 새로운 이름은 한셀 이후의 그의 삶을 형상화한다. 개인과 이름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의 삶은 가발과 불가분의 관계에 놓이게 된다. 새로운 삶을 가발과 함께 시작한 헤드윅에게 한 때 그것은 희망과 사랑의 증표였지만, 이후에는 족쇄가 된다. 헤드윅은 언제나 가발을 쓰고 등장한다. 쉬거나 잠을 잘 때에도 가발을 하는 등 가발을 대하는 그의 모습은 집착적으로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이것이 그의 자발적 선택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음은 명백하다. ‘Wig in a box’ 중 ‘모두 너 때문(It’s all because of you)’이라는 가사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가발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루터 로빈슨과 같은 애인 혹은 매춘이라는 돈벌이를 위한 것이었음을 쉽게 짐작해볼 수 있다. 따라서 같은 노래의 가발을 벗고 ‘진짜 자신으로 돌아가는 것(turn back to myself)’이 헤드윅에게는 불가능하다. 가발을 벗더라도 살아가기 위해 그는 다시 가발을 써야만 하고, 그의 이름 ‘헤드윅’은 마치 가발처럼 그의 삶에 얹혀 있기 때문이다. 이름에 평생 묶인 것처럼, 그는 자신의 이름이자 ‘가발’이라는 하나의 상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록스타가 된 시점에 이르기까지 가발을 착용한다. 팬들이 그의 상징으로 이용하는 것은 또 다시 가발이다. 그의 이름 ‘헤드윅’은 이렇듯 그의 모든 정체성에 우선하고 있다.
‘토미 노시스’도 마찬가지로 이름을 부여받으며 새로 태어난 인물이다. 그가 부여받은 이름 ‘노시스’는 ‘지식’이라는 뜻으로, 여기서 ‘지식’은 헤드윅이 어린 토미에게 알려준 것들을 의미한다. 토미에게 있어 헤드윅은 선악과를 먹은 이브와 같은 존재이다. 그가 원죄를 범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악과를 통해 지식을 알고, 신과 아담에게서 해방되어 그 지식을 전수하는 존재라는 데 그 의미가 있다. 헤드윅과의 첫 대면에서 토미는 그 지식을 자신에게 나누어줄 것을 요청한다. 따라서 토미가 아는 지식은 결국 헤드윅의 지식이고, 그 지식의 원천은 역시 헤드윅이기 때문에 그는 헤드윅의 노래만 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의 이름과 마찬가지로, 그의 정체성과 노래는 헤드윅의 복사품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의 후반부 토미의 ‘Wicked little town’은 헤드윅의 상상이다. 자신의 이름에 짓눌려 ‘노시스’가 될 수 없었던 ‘헤드윅’은 그 지식의 모습을 토미에게 투영했고, 마지막 토미의 노래를 통해 자신을 포함한 모두를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그제서야 ‘헤드윅’은 자신이 ‘노시스’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입을 통해서 용서의 과정을 거치기에는 헤드윅 그 자신이 분노와 혼란에 가득 차 있던 상태이기 때문에, 용서의 과정은 그가 만들어 낸 지식의 형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노시스’가 된 ‘헤드윅’은 사랑의 기원에서 갈라졌을 자신의 반쪽을 찾는 것을 그만둔다.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 남긴 상처까지 자신의 모습으로 받아들이며, 그는 지금껏 그를 짓누르고 있었던 가발이자 이름 ‘헤드윅’에서 벗어나 그의 온전한 정체성을 찾는다. 그의 경험과 수 없는 고통에서 얻은 지식이 마치 에덴동산의 이브처럼, 헤드윅을 해방시킨 것이다. 자신을 포함한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 그의 앞면까지 온 세상에 내보이고 스스로 받아들이며, 그렇게 노시스도 헤드윅도 아닌 그 자신이 된다. 이름으로 명명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불운했던 과거와 분노에 대해 노래하는 것이 아닌, 미래를 노래하며 발을 내딛는 그의 모습은 그렇기에 눈물겹고 아름답다.
영화 ‘헤드윅’은 오랜 기간 이름에, 그에 따른 운명에 짓눌리던 한 인간이 그 이름과 폭력적으로 주어진 정체성에서부터 벗어나는 하나의 대장정이다. 가발에서 벗어나 그것을 넘겨주고 백보컬로 희미하게 사라지는 그의 모습에서 그가 드디어 제 자리를 찾았음을 관객은 직감한다. 이 세상 모든 헤드윅들이 ‘이름’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 낸 한낱 산물에 짓눌리는 삶을 더 이상 살지 않아도 되는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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