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아이러니와 멜랑꼴리

영화 '수성못'

김준모 | 기사승인 2021/05/12

삶의 아이러니와 멜랑꼴리

영화 '수성못'

김준모 | 입력 : 2021/05/12 [10:00]

 

▲ '수성못' 스틸컷  © 인디스토리

 

[씨네리와인드|김준모 기자] 2010년대 들어 영화계의 화두는 청춘의 고난과 역경이 되었다. 먹고 사는 문제가 힘들어진 현대 청춘들의 모습을 조명하며 그들의 현실을 조명하고 소소한 위로를 건네는 작품이 다수 등장했다. <수성못> 역시 청춘이란 측면에서 볼 때 이 범주에 속하는 작품이다. 희정과 영목, 희준은 각자가 원하는 걸 이루지 못하는 고난과 역경에 빠진 청춘들이니 말이다. 감독의 제작 과정 역시 이런 생각을 뒷받침한다.


영화 일을 하면서 한계에 부딪쳤던 유지영 감독은 고향인 대구로 내려갔다고 한다. 작품 속 공간이기도 한 수성못을 보며 그때 감독이 품었을 좌절과 고통이 이 영화에 담긴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우울의 정서가 강하다. 이 정서를 한 단어로 압축하자면 멜랑꼴리라 할 수 있다. 멜랑꼴리는 장기적이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을 표현하는 단어다. 개인의 힘으로 이겨낼 수 없기에 시대나 운명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현재의 청춘이 지닌 보편적인 정서 역시 멜랑꼴리라 볼 수 있다. 고학력에 고스펙을 갖춰도 이겨내기 힘든 취업난과 좋은 일자리의 부족은 극복할 수 없는 무게처럼 느껴진다. <수성못> 이 이런 감정에 보편성을 더하는 건 아이러니를 통해서다. 특정 세대나 시대에 머무르는 게 아닌 인간의 삶 자체에 짙게 깔린 아이러니를 통해 멜랑꼴리의 정서를 파고든다. 청춘의 우울 이 현상으로 볼 수 있는 거시적인 관점이라면, 삶의 우울은 미시적인 관점을 지닌다.


프로이트의 심리학은 한 개인의 정신적인 문제를 밝혀내기 위해 그 과거를 세세하게 분석한 다. 삶의 우울은 특정한 사건과 공통된 시대가 아닌 인간이라면 겪을 수 있는 보편적인 상황 에서 비롯된다. 그럼에도 분석은 원인을 밝혀내야하기에 거시적인 관점인 시대나 상황, 사건 을 가져온다. 학생이라면 시험이, 어른이라면 미래에 대한 불안이 우울의 이유가 된다. 영화는 배경에 깔린 우울을 표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아이러니가 보이는 상황을 설정한다.

 

▲ '수성못' 스틸컷  © 인디스토리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


‘필사즉생필생즉사(必死則生必生則死)’는 이순신 장군의 좌우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의 일 기 <난중일기>에 기록된 이 글귀는 ‘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수성못>이 보여주는 주인공들의 상황은 이 ‘필사즉생필생즉사’와 놀랍도 록 일치한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인물은 죽음에 가까워지지만, 반대로 죽고자 하는 인물은 삶에 가까워진다. 열심히 사는 게 마치 죄라는 듯 말이다.


희정은 아르바이트를 하며 편입을 준비한다. 서울에 있는 대학으로 진학을 하는 게 희정의 꿈 이다. 이런 희정 앞에 박씨가 나타나면서 예기치 못한 인물과 엮이게 된다. 박씨의 자살소동 은 희정이 엮이기 싫은 인간, 영목을 만나는 계기가 된다. 영목은 자살예방센터에서 일을 한 다. 영목을 만나면서 희정은 자신과 반대편에 선 사람들을 접하게 된다. 이들은 삶의 의욕보 다 죽음과 더 가깝다.


희정의 근처에도 그런 인물이 있다. 바로 남매 희준이다. 희정이 공부나 운동 등 자기계발을 위한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보이는 반면 희준은 미래를 향한 목적을 지닌 행동을 보이지 않는 다. 희정은 삶을 영위하고 싶지만, 희준은 내일 당장 삶이 끝난다 하더라도 사과나무 한 그루 심을 생각도 없다. 운동복을 입고 공터를 질주하는 희정의 모습에서는 생명력이 느껴지지만, 곰처럼 앉아있는 희준에게서는 그런 활기를 찾아볼 수 없다. 이런 두 사람이 아이러니한 상황 에 처할 것이란 복선은 어머니의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여성감독들의 작품은 가정 내에서 이뤄진 남존여비(男尊女卑) 현상을 담는다. <벌새>에서 은희가 오빠한테 폭행을 당하는 장면은 감독의 단편영화 <리코더 시험>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폭력에도 불구 오빠를 혼내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은 당시 감독이 느꼈던 부당함과 슬픔을 보여준다. 희정 역시 자신의 꿈을 지지해주지 않는 어머니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이 고통은 희정과 희준이 각자의 길을 가는 장면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희정은 편입시험을 보기 위해 서울로 올라간다. 차가운 밤공기에 홀로 버스에 오르는 희정의 모습은 희망을 품은 표정과 달리 쓸쓸함을 준다. 희준은 집단자살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난다. 희준이 일찍 나가 는 걸 아는 엄마는 상을 차려놓는다. 엄마가 쓴 메모를 보는 희준의 우울한 표정과 달리 불 꺼진 집안의 공기는 따뜻하다.


‘살고자 하는’ 희정은 죽음을 향해가지만, ‘죽고자 하는’ 희준은 삶의 끈이 그를 놓아주지 않 는다. 인생을 개척해 나가고자 하는 희정 앞에는 엄마부터 영목까지 수많은 장애물이 존재하 는 반면, 종료버튼을 누르려는 희준은 보이지 않는 구원의 손길이 계속 팔을 잡는다. 살아있 는 꽃에 흙을 덮고, 죽은 꽃에 물을 뿌리는 이 아이러니한 전개는 삶이 지닌 불평등의 요소가 우리의 운명에 내재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 모두 블랙코미디의 핵심요소라 할 수 있는 비극의 상황에 처한 다는 점이다. 블랙코미디는 비극의 요소에서 웃음을 유발한다. 고통과 우연을 통해 쓰디쓴 웃 음을 선사하는 블랙코미디의 매력이 이 작품에는 진하게 베여있다. 그 우연은 한 사람 앞에는 악마로, 다른 사람 앞에는 천사로 나타나지만, 결론은 동일한 고통에 머문다.


이는 영목에게도 마찬가지다. 자살예방센터에서 일하지만, 자살을 꿈꾸는 영목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다. 스스로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다. 경계에 선 인물 이기에 어떤 우연한 상황이 발생한다 하더라도 기쁨의 형태로 다가올 수 없다.

 

▲ '수성못' 스틸컷  © 인디스토리


호수 위에 오리


이런 세 사람의 모습은 마치 수성못 위에 오리배를 연상시킨다. 오리배는 아무리 발버둥을 쳐 도 수성못 밖으로 나갈 수 없다. 호수 안에 갇혀 그 안을 돌고 또 돌아야 한다. 희정에게 수 성못은 떠나고 싶은 공간이다. 그저 서울이란 바다로 나가고 싶을 뿐인데 그 소원은 이루기 너무나 힘들어 보인다. 대학은 성인이 되어 사회로 나가는 첫 번째 발걸음일 뿐인데 그녀에게 는 정상을 오르는 등산처럼 여겨진다.


이 작품이 유지영 감독의 첫 장편데뷔작이라는 점에서 이에 대한 고민이 작품에 투영되어 있 음을 발견할 수 있다. 거창한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도 아닌데 감독으로 첫 걸음을 떼는 과정 이 힘겹게 다가왔을 것이다. 남들은 쉽게 오리배에서 내려와 지상으로 올라오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나는 균형을 잡기 힘들게 느껴진다. 희정이 박씨의 자살소동으로 인해 영목에게 약 점을 잡히는 설정은 이 수성못이란 굴레를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이 연못 안의 오리배라는 코드는 영목과 희준에게도 똑같이 작용한다. 영목은 자살이란 굴레 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옛 연인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자살소동은 그의 마음을 짓누르는 악몽 이다.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그는 계속 호수 아래를 바라보며 그 아래에 뛰어들지 말 지를 고민한다. 희준은 호수 아래에 들어가려고 하지만 계속 위로 떠오른다. 호수가 그의 잠 수를 허락해야 지겨운 삶의 연장은 종료된다.


작품의 공간인 수성못은 빠져나올 수 없는 지독한 굴레와도 같은 운명을 상징한다. 계속 앞으 로 달려 나가도 같은 곳으로 돌아오는 마법의 숲처럼 호수 위를 돌고 또 돌게 된다. 오리배는 열심히 페달을 밟아도 호수를 벗어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우울의 정서를 강화한다. 만약 블랙 코미디를 통해 피식 새어나오는 웃음의 숨구멍을 뚫어두지 않았다면 그 무게감에 짓눌러 관객 이 먼저 잠식당했을지 모른다.

 

▲ '수성못' 스틸컷     ©인디스토리


맥거핀이 된 남자


아이러니를 통한 우울의 정서가 영화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깊게 잠식시키는 걸 막기 위한 또 다른 장치는 맥거핀의 활용이다.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박씨가 그 주인공이다. 수성못을 찾아 와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는 박씨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이끌어 내며 호기심을 더한다. 핵심 적인 전개가 박씨와 관련될 것이란 혼란을 주며 관객이 조금은 늦게 영화의 무게감을 눈치 채 는 효과를 가져 온다. 박씨는 맥거핀인 동시에 아이러니의 정서를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 역시 영목과 희준처럼 자살을 꿈꾼다. 다만 두 사람과는 달리 그 이유가 확연하다. 영목과 희준의 자살에는 멜랑꼴리의 정서가 강하다. 불안과 상처라는 트리거가 있지만 결정적인 한 방이라 보기 어렵다. 반면 박씨는 아내의 불륜이란 원인을 통해 자살이란 결과를 이끌어낸다. 영목은 박씨의 자살을 돕고자 먼저 촬영을 진행한다. 카메라 앞에 선 그는 죽기 전에 아내와 그녀의 내연남을 향해 강한 분노를 표출한다.


자살을 시도하려는 순간,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박씨가 품은 감정인 억울함은 관 객이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적인 정서다. 아내와 내연남이 살아있는 상황에서 왜 자신이 죽어 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분노의 감정을 가져온다. 이 보편적인 정서는 영목과 희준에게로 연 결된다. 왜 이 두 사람은 죽고자 했는데 산 것일까. 이 신의 장난처럼 보이는 문구의 이면에 는 인간의 의지가 숨겨져 있다.


만약 두 사람이 정말 죽고자 하는 의지로 자살을 택했다면 집단자살을 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집단자살은 혼자 죽을 용기가 없어 다른 사람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른 자살에 비해 실패할 확률이 높다는 점과 본인이 아닌 남의 손에 죽는다는 점에서 책임을


전가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특히 한 번 집단자살을 시도했던 영목은 그 사실을 잘 알 것 이다. 그럼에도 다시 집단자살을 택한 이유는 여전히 삶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희준이 적극적으로 자살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이런 감정을 우회적으로 보여준다. 미래는 없 지만 그렇다고 막다른 골목도 아닌 삶이기 때문이다. 절망과 고통의 끝에 선 사람이라도 죽음 의 무게감은 어둡다. 우울의 색이 블랙(Black)이 아닌 블루(Blue)인 이유는 우울의 정서는 아 직 죽음이란 온전한 어둠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작품은 앞서 언급 한 아이러니의 묘미를 다시 한 번 선보인다.


살고자 했던 박씨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은 개인의 의지로는 어쩔 수 없는 아이러니의 정서를 보여준다. 이런 아이러니는 팀 로스 주연의 영국영화 <브로큰>을 떠올리게 만든다. 이 작품은 도입부에서 딸을 낳아 행복한 아빠 아치와 아내, 그리고 귀여운 딸 스컹크의 모습을 보여준 다. 이 도입부를 본 순간 관객은 본능적으로 슬픈 이야기가 시작될 것임을 직감한다. 과도한 기쁨은 슬픔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아내가 죽고 딸이 평생 당뇨병을 달고 살아야 하는 아치의 상황은 앞서 보여 준 정서를 배반한다. 삶의 위기나 고난이 끝난 주인공이 행복 앞에서 갑자기 고통에 처하는 아이러니는 카타르시스를 극대화시키는 요소다. 급격한 하강인 좌절을 통해 감정적인 격화를 이끌어낸다. <레옹>이나 <소년 소녀를 만나다> 등의 작품이 이런 효과를 보여준 바 있다. 박 씨는 맥거핀이자 씬스틸러 역할을 해내며 이런 극적인 카타르시스와 아이러니의 정서를 강화 한다. 세 주인공 앞에 어떤 운명이 닥칠지 보여주는 복선의 의미를 지니기도 한다.

 

▲ '수성못' 스틸컷  © 인디스토리


아이러니가 부른 멜랑꼴리


<수성못>의 아이러니는 인간의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운명론적인 힘이 있다. 대중매체가 주인공에 대한 감정이입을 몰입의 요소로 택한다는 점에서 생각해 볼 때 이 영화의 전개나 결 말은 생뚱맞거나 허무하게 느껴질지 모른다. 이런 느낌 역시 영화가 의도한 바라면 멜랑꼴리 의 정서가 짙게 묻어있다고 볼 수 있다. 흔히 말하는 피 땀 눈물 그리고 미소는 그 노력을 배 신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영화란 판타지는 이 노력을 충족시켜줄 의무가 있다. <쿨러닝> 같은 실패를 다룬 스포츠영화 도 도전정신과 휴머니즘을 통해 따뜻한 정서를 주는 게 영화의 미덕이다. 이를 배신한 작품들 의 특징은 삶이 지닌 우울을 담아낸다는 점에 있다. 최근 청춘을 다룬 영화가 보여주는 삶의 아이러니 속에서 현실의 멜랑꼴리를 탈출하는 판타지의 방법은 크게 세 가지다.


현실을 도피하거나(일본영화 <잠깐만 회사 좀 관두고 올게>), 따스한 위로를 건네거나(조정석, 임윤아 주연 <엑시트>), 통쾌한 한 방을 선사한다.(정재영, 박보영 주연 <열정같은소리하고있 네>) <수성못>은 이 세 가지 범주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 과장을 제외한 블랙코미디의 아이러니는 현실에 가깝다. 때문에 비극을 통한 고통이 더 심화된다.


이는 삶에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고통과 우울의 정서를 호수란 이미지에 어울리는 심연으로 확장시키는 효과를 보여준다. 오리배는 호수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한계와 동시에 바닥으로 빠지지 않기 위한 발버둥의 의미도 내포하고 있다. 오리는 물속으로 잠수할 수 없기에 심연의 어둠이 의미하는 죽음에 다다르지 않기 위해 분투한다. 때문에 ‘수성못’은 세 주인공의 아이러 니와 멜랑꼴리를 품은 최상의 공간이 된다.

 

 

김준모 기자| rlqpsfkxm@cinerewind.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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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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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05.12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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