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두 얼굴

「아메리칸 사이코」로 보는 물질주의와 패권주의의 위선

홍수빈 | 기사승인 2021/11/12

소통의 가능성을 부인하는 두 얼굴

「아메리칸 사이코」로 보는 물질주의와 패권주의의 위선

홍수빈 | 입력 : 2021/11/12 [11:02]

▲ '아메리칸 사이코' 포스터.  © 라이언스게이트


[씨네리와인드|홍수빈 리뷰어] 아메리칸 드림이란 미국 사회를 건설한 이주민들이 품고 있던 자유와 평등, 경제적 부에 대한 희망을 말한다. 아메리칸 드림은 인간적 가치보다 물질적 가치가 우위를 점하게 되면서 종국에 타락하고 만다. 미국의 많은 작가들은 문학 작품을 통해 타락한 아메리칸 드림을 비판했다. 스콧 F.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 존 치버의 「돼지가 우물의 빠졌던 날」, 「진의 슬픔」 등 많은 단편소설, J. D.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은 화려한 황금빛 장막에 감추어진 미국인들의 허위 허식과 가식을 지적한다. 이 문학 작품들은 공통적으로 추상적 개념인 부가 실재적 개념으로 환원된 물질적 재화들은 눈으로 볼 수 있고 피부로 느낄 수 있어 우리를 현혹하기 쉽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감각기관으로 느낄 수도 없는, 말하자면 정신적 교감으로만 느낄 수 있는 순수함이라고 말한다. 물질주의 사회는 소비 행위에 사회적 지위, 성공, 행복, 진가 등의 화려한 의미를 부여해 그 이면에 자리한 정신적 빈곤과 여러 부작용을 감추고 있다.

 

화려한 외면과 빈곤한 정신

 

타락한 아메리칸 드림을 비판하는 블랙코미디 영화 「아메리칸 사이코」 역시 물질주의의 그러한 위선적 특징을 차용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주인공 패트릭 베이트만은 낮에는 자본주의의 상징 월스트리트에서 부사장으로 근무하지만 밤에는 사이코 살인마로 변신한다. 그는 매일 아침 화장품으로 피부를 관리하고 몸매를 가꾸기 위해 운동에 전념하는데 이는 물질주의 소비사회의 화려한 겉모습을 상징한다.

 

패트릭은 남의 옷차림새와 명품으로 치장한 자신의 것을 비교하기 급급하다. 좋은 옷, 좋은 집, 좋은 차만이 그의 가치를 대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값비싼 재화는 돈 있는 누구든지 그것을 소유할 수가 있고 따라서 패트릭이라는 한 인간의 고유성과 개성은 절대 물건으로 표상될 수 없다. 사람들이 그와 똑같은 상표의 옷을 입고 안경을 쓴 사람을 패트릭과 구별하지 못하거나 다른 사람과 혼동하는 신이 자주 등장하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소비 능력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판가름 나는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과 개인의 관계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위대한 개츠비』에서 결국 데이지가 그녀를 순수하게 사랑한 개츠비 대신 탐욕스럽고 속물적인 닉을 선택하고, 「돼지가 우물에 빠졌던 날」에서 에스더가 한때 사랑했지만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러셀 대신 다른 이와 결혼한 것처럼 「아메리칸 사이코」 속에서 묘사되는 상류층들 역시 물질적 이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관계를 맺는다. 패트릭과 에볼린이 약혼을 했으면서도 서로의 불륜을 묵인해 주는 기형적인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이유도 그들의 관계가 사랑으로 인해 형성된 게 아니라 필요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타인과 대화하고 어울리면서도 관심의 촉수가 남이 아닌 자기 자신의 욕구에만 뻗어있기 때문에 내가 지금 대면하고 있는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도 모른다. 패트릭은 진실한 대화를 통해 그만이 가진 특별함을 발견하고 인간적인 속내를 나누기 위해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냉담하기만 하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소통 불능이 정신의 빈곤을 낳았고 인간적 가치를 잃어버린 시대를 만들었다.

 

▲ '아메리칸 사이코' 스틸컷  © 라이언스케이트

 

재물을 소유하고 소비함으로써 남들보다 더 우월해지려는 나르시시즘적 욕망은 경쟁의 양상을 띤다. 패트릭과 그의 동료들이 서로의 명함을 비교하며 누구의 것이 가장 훌륭한가 경쟁하는 신은 물건이 인간의 가치를 대변하게 된 세태를 우스꽝스럽게 풍자한다. 늘 무시하던 루이스가 자기보다 더 좋은 명함을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된 패트릭은 분노에 차 그의 목을 조르려고까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는 고급 레스토랑 ‘도르시아’를 예약하는 데에 실패하자 수화기 너머에서 자신을 비웃는 듯한 환청을 듣는다. 패트릭의 피해망상과 열등감은 결국 도르시아를 예약할 만큼 능력 있는 폴 앨런에 대한 질투심으로 번진다. 그리고 낮 동안의 이미지, 성공한 상류층 인사로서의 화려한 외면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내면의 추악한 살인마가 활개 치는 밤이 찾아온다. 패트릭은 자신을 마커스로 착각하는 폴 앨런과 저녁 식사를 마치고 그를 집으로 초대해 살해한다. 인간성을 상실한 이 내면이야말로 패트릭 베이트만 즉 물질주의 사회의 진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소통의 가능성을 부정하는 패권주의

 

1980년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아메리칸 사이코」는 그 당시 백인 기득권자들이 가진 불안감을 드러낸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신의 우위에 서는 일이다. 이러한 불안감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자기애에서 돋아났기 때문에 타자와 하나 되는 소통의 가능성을 멸식시켰다. 외로움과 정신적 빈곤은 물질주의 소비사회의 아름답고 화려한 외면에 감추어져 곪아갔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럴싸한 명목이나 이미지를 내세우며 부도덕한 의도와 속내를 감추는 가면극은 비단 물질주의만의 특성이 아니다. <아메리칸 사이코>를 읽는 또 하나의 방법은 그러한 위선이 패권주의를 풍자적으로 묘사하는 데에도 적합하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것이다.

 

본토에서 얻을 수 없던 종교의 자유를 꿈꾸며 초기 미국 사회를 건설한 이주민들은 청교도주의를 앞세워 타의 모범이 되는 공동체를 구성하려 했다. 이러한 선민사상이 미국은 유럽 국가와 다르다는 예외주의 논지로 발전하여 쿠바 경제 간섭, 필리핀 식민지 점령, 베트남 전쟁 개입 등 자국의 패권주의적 행보에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질서와 선을 수호하는 세계 경찰 역을 자행했지만 그 내면에는 국가의 우월성을 확립해 이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러한 패권주의는 평화와 화합의 기준을 자문화 중심으로 하여 서구 문명에 동화되기를 거부하는 국가들을 배척하고 타민족에 경계선을 긋는다. “현실을 직시해요, 일본인들이 90년대 말에 이 나라 대부분을 차지할 거예요.”라는 대사, 이란과 협력할 수 있다는 텔레비전 아나운서의 말에 “어떻게 저런 거짓말을 할 수 있지? 저것 좀 봐, 착한 영감탱이처럼 말하는데, 속마음은….”이라고 조소하는 대사에는 외부 문화를 경계하고 적대시하는 심리를 드러낸다.

 

▲ '아메리칸 사이코' 스틸컷  © 라이언스케이트

 

외부의 타자들에 대한 적개심은 결국 그들을 정복하고 굴복시켜야 한다는 폭력적인 논리로 이어지기 쉽다. 결국 패권주의에는 소통의 가능성이 아니라 오로지 힘의 논리만 존재하는 것이다. 패트릭의 힘과 권력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인물들에게 폭력을 가하고 그들을 억압함으로써 입증된다. 영화 속에 패트릭과 다른 인종, 성별, 계급을 가진 인물들은 패트릭에 의해 완벽히 타자화되고 있다. 패트릭은 세탁소에 맡긴 셔츠의 얼룩이 빠지지 않은 것을 보고 가게를 운영하는 동양인 부부에게 화를 내는데 패트릭은 그들이 하는 영어를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다. 어느날 패트릭은 골목에서 흑인 실직자를 만나고 그에게 자선을 베풀어 줄 것처럼 굴다가 폭행을 가한다. 이때 그는 실직자에게 일을 하라고 다그치는 등 그가 왜 거리로 몰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뒷사정은 전혀 알려고 하지 않기에 그의 외침은 메아리처럼 허무할 수밖에 없다. 패트릭이 만난 모델 여성은 그가 모델을 멍청하다고 생각하는 일반인들과는 다를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패트릭에게 그녀 또한 동등한 인간이 아니라 자신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무너뜨러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았다.

 

‘아메리칸’ 사이코인 패트릭은 미국을 상징하며 그의 위선은 곧 미국 패권주의의 위선이다. 그런 의미에서 패트릭이 새끼 고양이를 귀여워하다가 급격하게 태도를 돌변하는 신 역시 패트릭 개인의 잔혹함을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숨겨진 의미를 분석해야 하는 신이다. 패트릭은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쓰다듬다가 곧 ATM기 스크린에 뜬 “집 없는 고양이를 먹여주세요.” 문구를 본다. 문구는 클로즈업 되고 바로 다음 패트릭이 고양이에게 총구를 겨누는 숏과 병치 된다. 이는 고양이에게 자선을 베풀어 달라는 숏과 패트릭이 고양이를 총으로 위협하는 숏에 동등한 무게를 부여한다. 패권주의의 욕망은 우월한 국가가 그렇지 않은 열등한 국가를 선도한다는 자선의 이름으로 포장된다. 그들의 실리에 반하는 문화를 정복하고 전유하는 행동을 힘 있는 국가의 선의로 덧씌우는 일 그 자체가 외집단에 총구를 들이미는 폭력인 것이다.

 

하지만 겉과 속이 다른 위선의 연극을 제지하기란 쉽지 않다. 패트릭이 새끼 고양이를 죽이려 하는 것을 본 어느 노인이 그를 말리지만 노인은 패트릭이 쏜 총에 맞아 죽는다. 노인의 죽음으로 시작해서 패트릭의 광기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무고한 시민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하다가 결국 경찰에 쫓기게 된 패트릭은 변호사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한다. 다음 날 아침 세상은 어젯밤 있었던 끔찍한 사건은 다 잊은 듯 바삐 돌아가고 있었고 패트릭을 알아보지 못하는 변호사 지인은 그날의 전화를 농담으로 여긴다. 영화가 끝나기 10분 동안 패트릭의 행적과 모순되는 증거들이 제시되어 관객들은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허상인지 알수 없게 되어버린다. 패트릭은 모든 일이 한바탕 꿈과 같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며 그의 동료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그때 이란과의 협동을 추구해야 한다는 TV 아나운서를 비웃는 대사를 끝마치는 건 패트릭의 보이스오버다. “속마음, 속마음은 중요치 않다.” 왜냐하면 거짓과 진실을 분간하기 어려워진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은 허울뿐인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적 가치의 회복을 위한 길

 

내집단만의 우위를 주장하고 결속을 강화하는 집단은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 속에서 패트릭 베이트만을 비롯한 파멸한 영혼들이 입증하는 바이다. 우리는 「아메리칸 사이코」를 통해 타인과의 소통과 교류를 방해하는 위선의 구조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

 

위선과 가식을 버리고 진심을 공유하는 일은 우리에게 더 큰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허위뿐인 가치에서 벗어나 정신을 자유롭게 만들고 경계심에서 비롯된 불안감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겉모습에 현혹되기보다 그것이 가진 추악한 내면을 알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것은 타락한 아메리칸 드림을 비판했던 작가들이 주창하던 인간성 회복의 길이기도 하다. 거짓과 진실의 분간이 더욱 어려워진 시대에서도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성은 시공간에 굴하지 않고 등대의 불빛처럼 가야할 길을 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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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빈
씨네리와인드 미디어본부 객원취재팀 기자단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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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11.12 [1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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