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하여

스파이크 존즈, 「존 말코비치 되기」

홍수빈 | 기사승인 2022/01/13

욕망의 진정한 주인이 되기 위하여

스파이크 존즈, 「존 말코비치 되기」

홍수빈 | 입력 : 2022/01/13 [11:45]

▲ '존 말코비치 되기' 포스터  © USA필름스

 

[씨네리와인드|홍수빈 리뷰어세상의 수많은 이야기를 몇 가지 공통점으로 묶고자 한다면 가장 많은 이야기를 포괄할 수 있는 단어는 아마도 ‘욕망’이 될 것이다. 욕망은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심장과도 같다. 주인공이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는 과정이 곧 이야기가 되고 주인공의 욕망이 다른 누군가의 이해관계와 충돌하는 갈등은 이야기를 절정에 달하게 한다.

 

욕망에 따른 이야기의 작동 원리는 우리 삶에도 비슷하게 적용된다. 먼저, 인간은 최소한의 생리적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하면 생명을 부지할 수 없는 존재이다. 생리적 욕구를 제외하고라도 매슬로우가 정리한 인간의 욕구 5가지 단계인 안전의 욕구, 사랑의 욕구, 존경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는 평생 소망하고 좇는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인생이라는 개개인의 이야기는 다양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더욱더 풍요로워진다. 『존 말코비치 되기』의 등장인물 맥신은 욕망하는 사람들을 이렇게 정의한다. “정열적인 사람들, 원하는 걸 쫓아가는 사람들은 원하는 걸 못 얻을 수도 있어. 하지만 최소 생기는 넘쳐. 그러니까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 별로 후회할 게 없어.”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욕망이라는 주제를 발견하기는 쉽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작품이 그러한 주제를 통해 표현하고 있는 메시지를 해석하는 일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는 욕망의 본질을 말하는 영화로도 파악될 수 있다. 배우의 몸속으로 들어가 그의 삶을 체험한다는 환상적인 이야기의 영화가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느낄 수 있는 까닭은 실존 인물의 본명을 작품 속 인물에게도 그대로 부여한 영화의 유머러스함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과 허구적 이야기 모두 욕망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가 우리의 실제 삶과 연결된 이야기라면, 영화가 제시하는 메시지를 통해 현실을 이해하는 일도 가능할 것이다.

 

<존 말코비치 되기> 욕망을 말하다

 

모든 이야기가 인물의 욕망을 허락하는 건 아니다. 또한 바라던 바를 이루게 한 뒤 그것이 가진 의미를 축소하는 이야기들도 많다. 후자는 욕망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현재에 만족하는 방법을 알려주지만 그러한 교훈은 언제까지나 소망을 이룬 후에야 깨닫게 될 가르침이다. 중요한 건 우리에게 욕망은 현재진행 중인 이야기란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욕망하는 상태에 있는 인물에게 공감을 느끼고 매료된다.

 

크레이그는 성공한 인형조종사가 되는 게 꿈이다. 그러나 그의 무대는 어두운 지하실과 차가운 길거리가 전부다. 그것도 언제나 논쟁적인 인형극을 시연해 사람들의 빈축을 사기 일쑤다. 크레이그가 세상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그가 조종하는 인형처럼 작고 초라하기만 하다. 사물의 크기를 이용해 현실을 조망하는 시도는 그가 텔레비전에 등장한 유명 예술가를 비아냥거리는 신에서 더욱 극적으로 다가온다. 그는 지하실에서 조그만 인형들을 다루는 자신의 처지와 대비되게끔, 유명 인형조종사가 18m 인형을 이용해 연극을 선보이자 질투에 사로잡힌다. 크레이그는 사기꾼이라며 무시하지만 한편으로 이렇게 말한다. “의식이란 건 끔찍한 저주니까. 난 생각하고 느끼고 고통받거든.” 크레이그는 작고 볼품없는 현실과 커다랗고 원대한 욕망의 간극 사이에서 헤매고 있다. 그리고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품게 하는 자아는 저주스러운 것이다.

 

크레이그는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나를 감추어야 하는 모순을 품고 있다. 크레이그가 그의 얼굴을 한 인형을 조종해 절망과 환희의 무대를 연출하는 영화의 오프닝신은 그의 운명을 예견한다. 진정한 내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감추어야 한다는 모순은 훗날 그가 인형이 아니라 존 말코비치의 몸을 조종해 욕망을 이루도록 만든다. 앞서 욕망을 이루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삶이라는 이야기는 더욱 풍요로워진다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우리는 욕망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자아를 실현함으로써 타인과 구별되는 삶의 개체성과 유일성을 확보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은 때때로 타인의 모방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우리는 되고 싶은 모습을 말할 때 흔히 다른 사람의 모습을 예로 들어 설명한다. 타인이 훌륭하게 자신의 업무를 수행하는 걸 보고 그 사람과 같은 직업이 되길 희망한다든지, 멋있어 보이는 타인의 행동을 내 것으로 만들려는 행위들은 자아를 담아낼 그릇으로써 인형을 요구하는 크레이그와 닮았다. 타인의 모습을 통해 나를 찾고자 하는 욕망은 변신의 추구다. 이러한 변신의 추구는 현실의 내가 초라하고 남들로부터 소외되었을 때 더욱 강렬해진다.

 

▲ '존 말코비치 되기' 스틸컷  © USA필름스

 

크레이그가 존 말코비치로 통하는 관문을 찾아낸 장소가 7층과 8층 사이 7과 2분의 1층이라는 모호한 곳에 위치한 까닭은 타인이 되고 싶다는 욕망이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을 때 강렬해지기 때문이다. 정신은 어른이지만 신체가 아이처럼 작은 사람을 위해 지어진 이 회사는 천장이 낮아 마치 인형의 집을 연상시킨다. 이곳에서 크레이그와 맥신은 존 말코비치가 될 수 있는 체험을 판매한다. 사업은 저마다의 욕망에 이끌려 타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에 의해 호황을 맞게 된다. 뚱뚱한 외형에 불만을 품고 있던 남자는 존 말코비치가 됨으로써 특이한 구원을 체현하고 라티는 남성의 신체를 경험한 뒤 새로운 정체성을 발견한다.

 

<존 말코비치 되기>에서 이야기의 갈등 또한 욕망의 충돌에 의해 발생한다. 라티와 크레이그는 동시에 맥신의 사랑을 갈구한다. 맥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 그들은 존 말코비치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인형조종사인 크레이그는 마침내 말코비치의 몸 역시 인형처럼 완벽히 지배하고 라티와의 경쟁에서 승리해 사랑과 꿈을 쟁취한다. 그러나 작품에서 다른 부차적인 욕망에 우선하여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욕망은 삶에 대한 욕망으로 제시된다. 존 말코비치로 향하는 관문은 타인의 육체에 들어가 영원을 살길 바라던 레스터가 만든 통로였다. 그는 자신처럼 영생을 소망하는 사람들과 함께 말코비치의 몸속으로 들어가려 한다. 삶을 향한 그들의 욕구는 크레이그를 쫓아내고 최종적으로 말코비치의 몸을 차지한다.

 

타인이 되고 싶은 바람

 

인간이 사회적 동물인 이상 타인을 흉내 내지 않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언어, 문화, 규범과 관습을 타인의 행동을 통해 습득한다. 타인에 대한 모방 역시 욕망만큼이나 생존을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홉스의 말대로 우리가 개인의 욕망대로만 살아가려 한다면 자연 상태는 언제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가 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규칙을 벗어나지 않는 한에서만 욕망할 수 있게 되었다. 축소된 욕망은 남들처럼 규칙과 관습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기만을 바라게 한다. 가령 크레이그는 인형조종사가 되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기존의 사회적 윤리와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는 인형극을 만들기 때문에 비난받는다. 결국 그는 욕망을 포기하고 남들처럼 회사원의 길을 택해야만 했다.

 

또한 사람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외모와 명예, 지위만을 보고 타인을 쉽게 정의내리기도 한다. 성공한 사람은 타의 모범으로 추앙받아 모두가 그 같은 사람이 되기를 욕망하지만 그러한 욕망은 언제까지나 겉모습에만 영향을 받은 결과다. 타인이 되려는 욕망은 인간의 내면과 그의 본질을 꿰뚫어 보지 못한다. 사람들은 타인에게서 존경받는 이들, 사회가 정한 성공 기준을 달성한 사람들은 아무런 고통도 갈등도 없이 행복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 환상 속에 가둬진 그 사람처럼 되기를 바란다. 영화 속 존 말코비치 역시 유명한 영화 배우로 사람들의 존경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인물이다. 그러나 라티가 말코비치의 잠재의식 속에서 맥신을 추격하는 신은 그의 여러 가지 트라우마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우리가 다 같은 인간이라면, 슬픔과 고통은 피할 수 없는 길이며 따라서 내가 아닌 타인이 된다고 해서 모든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타인에 대한 모방 욕구가 항시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사회 규범과 규칙의 순기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문제는 타인이 되길 바라는 것, 변신으로의 추구가 몰개성화를 가져오고 차이를 인정하는 평등이 아니라 같음만을 인정하는 평등을 초래할 때다. 우리는 기존의 잘못된 관습을 지적하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현실에 순응하고 남들처럼 살아가라는 말을 듣는다는 걸 알고 있다. 타인이 되고자 하는 욕망은 현제도와 규범 안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공고히 하기 위해 구성된 강요를 개인이 내재화한 결과일 수 있다.

 

▲ '존 말코비치 되기' 스틸컷  © USA필름스

 

욕망의 원리

 

말코비치의 몸 밖으로 나온 크레이그는 맥신을 찾아가지만 맥신은 이미 라티와의 사랑을 확인한 뒤였다. 맥신은 말코비치일 때의 라티만을 사랑할 수 있을 줄 알았고 라티 또한 맥신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말코비치가 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라티는 말코비치의 몸에 들어갔다 나온 순간 자신의 정체성을 남성으로 정의하고 트랜스젠더 수술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러나 라티는 말코비치가 되지 않아도, 즉 자신이 원래 가지고 있던 정체성을 포기한 채 타인이 되지 않아도 맥신과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에 등장하는 개념 ‘욕망의 삼각형’은 소설 속 인물들의 욕망을 설명하기 위해 고안되었다. 이 개념에 따르면 이야기의 인물들은 타인에 의해 촉발된 욕망을 모방을 통해 성취하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욕망의 불씨를 댕기는 타인과 그러한 타인에 의해 간접적으로 얻게 된 ‘가짜 욕망’, 그리고 욕망을 쟁취하려는 주인공은 삼각형 구도를 이룬다. 맥신을 사랑하기 위해 남자인 말코비치가 되어야 한다는 욕망은 이성애 중심 사회의 편견에 입각한 욕망일 뿐이다. 작중 레즈비언에 대한 차별적인 대사는 동성애자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성적판타지 속에서만 등장하는 것으로 규정짓는 사람들의 생각을 잘 묘사한다. 남성인 말코비치가 되고 싶다는 라티의 욕망은 그러한 편견을 내재화한 탓에 발생한 가짜 욕망일 뿐이다.

 

홀로 남겨진 크레이그는 다시 말코비치의 몸으로 들어가 맥신의 마음을 얻으려 한다. 하지만 그날 관문으로 통하는 길에는 특정한 법칙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서 문에 들어가게 되면 신생아의 몸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아무것도 통제 못 하고 영원히 타인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한다. 결국 크레이그는 라티와 맥신의 딸 에밀리의 몸속에 갇혀 평생 그녀의 눈으로 자신의 실패한 사랑을 목도해야하는 결말을 맞이한다. 이러한 결말은 크레이그가 라티를 우리 속에 가두던 장면과 완벽히 대비되는 구도로 일종의 통쾌함마저 자아낸다. 하지만 우리가 크레이그와 달리 타인의 시선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지 않고 오로지 나의 의식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한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을까? 나의 욕망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없는 한 그것이 가짜 욕망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우리 삶에 욕망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간파하는 일이야말로 자아를 찾기 위한 우선의 길일 것이다. 이야기와 삶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삶에는 ‘나’라는 주인공을 조종하는 절대적 작가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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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빈
씨네리와인드 미디어본부 객원취재팀 기자단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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