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클라이맥스 속 서사의 세계 : 박찬욱 『아가씨』 를 중심으로

「아가씨」(2016), 박찬욱

이하늘 | 기사승인 2022/03/02

안티클라이맥스 속 서사의 세계 : 박찬욱 『아가씨』 를 중심으로

「아가씨」(2016), 박찬욱

이하늘 | 입력 : 2022/03/02 [10:05]

[씨네리와인드|이하늘 객원기자] 감각적인 미장센과 복수의 서사, 허무주의적이지만 그 안에 숨은 유머 등등 그것들은 모두 영화계의 거장 박찬욱 감독에게 뒤따라오는 수식들이다. 그를 상징하는 타이틀은 어느새 모든 영화 앞에 붙는 형용사가 되었으며 그 자체가 되었다. 2000년대 초반부터 확장되어 온 그의 세계 속 감각들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달은 해가 꾸는 꿈>(1992) 감독 겸 각본을 시작으로 <공동경비구역 JSA>(2000), <복수는 나의 것>(2002), <올드보이>(2003), <친절한 금자씨>(2005), <싸이보그지만 괜찮아>(2006), <박쥐>(2009), <스토커>(2013), <아가씨>(2016)에 이르는 영화를 제작했다. 현재 탕웨이, 박해일 주연의 <헤어질 결심>의 개봉을 앞두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그의 영화들은 소위 ‘박찬욱 장르’라고 불리는데 한국영화계에 센세이션을 가지고 왔을 뿐만 아니라, 해외 관객들 또한 놀라게 했다. 그만큼 다양한 언쟁들이 오갔다. 10여 편이 되는 그의 영화들은 기존의 비평가들로 하여금 수술대 위에 올랐다. 비평가들은 수술대 위에 오른 영화들을 분해하고 찢어내기 시작했다. 영화를 부검하는 과정이 이루어진 것. 키보드라는 의료용 수술 칼을 지니고 국과수 부검의가 되어 수술을 진행했다. 부검의 결과는 제각기 달랐고, 형식 또한 달랐다. 비평가들은 제작기 다른 박찬욱의 영화 세계를 언급했다. 그 중에서도 리처드 페냐(영화 평론가, 뉴욕영화제 집행위원장), 김영진(영화 평론가), 김소희(영화 평론가)의 비평의 단락들을 가져와 부검의 결과에 관해 논의해본다. 

 

▲ 박찬욱  © 아가씨 스틸컷

 

기존의 비평가들이 주목한 박찬욱의 영화 세계 

 

리처드 페냐 영화 평론가는 박찬욱이 다루는 폭력의 주체에 대해 주목했다. 흔히 복수 3부작이라 불리우는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는 개인의 폭력성이 타인에게까지 이르는 과정을 포인트로 잡았다. 타인을 향한 복수에 대한 욕망이 개인을 파멸하게 하는 아이러니. 오이디푸스 신화의 구조적 특성을 가진다는 <올드보이> 또한 이우진(유지태)이 오대수(최민식)에게 15년에 걸친 복수를 하지만, 복수의 끝은 결국 스스로 파멸이다. 리처드 페냐의 글의 한 부분을 가져와 박찬욱의 세계에 대해서 더 말해보기로 한다. ‘씨네21 [영화읽기]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이 남긴 것’(2007.05.17.)에 실린 비평을 살펴보자. ‘필자가 생각하기에 ‘복수 3부작’에서의 폭력은 현대사회 속 개인의 문제점들에 대한 박찬욱 접근법과 관련이 있다. 그것은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한계점이다. 폭력은 한 개인의 의지를 통제 또는 제한하려는 모든 규범과 관습에 대항하는 확고한 주장이 된다. 박찬욱 영화에서 다른 이에 대한 폭력 행위나 그에 대한 동의는 고의적인 경계 넘기를 내포하고 있다. 이것은 <친절한 금자씨>에서 가장 파괴적인 부분인 결말. 즉, 백선생에게 살해당한 아이들의 부모가 복수하는 장면에서 가장 훌륭하게 드러난다. 박찬욱 영화에서의 그 수많은 폭력 신들에도 불구하고 폭력이 영화적인 무희나 추상적인 의식행위처럼 당연시되어 표현된 적은 한번도 없다. 대신 박찬욱은 폭력에 대한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긴 여정을 표면에 내세운다.‘ 폭력은 점차적으로 탑재된다. 폭력과 타인과의 관계성은 박찬욱의 영화 속 복수를 말할 때 놓쳐서는 안 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의 폭력성에는 무의미한 이미지의 아름다움이 아닌 폭력의 연대가 있다. 덩어리 진 감정들은 이내 휴화산의 부글거리는 분출처럼 막을 수 없는 감정의 기폭제가 된다. 리처드 페냐가 말한 박찬욱의 폭력에 대해 주목하며 그의 세계를 분해한다. 그렇다면 기존의 다른 평론가들은 어떤 언급을 했는지 궁금해진다. 초기작인 복수 3부작을 넘어서 가장 최근작 <아가씨>를 분해한다면 어떨까. 그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 확장 되어있을까. 김영진(영화 평론가)과 김소희(영화 평론가)의 비평을 토대로 이야기를 나눠본다.

 

김영진,김소희 영화 평론가가 언급한 박찬욱식 영화 <아가씨>

 

‘씨네21 [김영진의 영화비평] <아가씨> 계급과 성차의 대립항을 세우고 부순 박찬욱식 영화언어’(2016.06.21)에 실린 비평 기사 속에 그러한 언급이 드러나 있다. ‘<복수는 나의 것>(2002) 이후 박찬욱의 모든 영화는 서사가 비틀리거나 왜곡된 서사의 틈에 자기 스타일을 밀어 넣었다. 원작이 있었던 <올드보이>(2003)와 <박쥐>(2009)의 경우에도 서사는 기승전결로 치고 올라가 예측할 수 있는 지점에 만족스럽게 도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영화는 처음부터 뭔가 과잉 결정된 지점들이 있어서 클라이맥스로 올라가야 할 곳에서 그것들이 일제히 들고 일어나 안티클라이맥스로 방향을 트는 인상을 주는데,(...)’ 라고 언급한다. 김영진 영화 평론가는 ‘안티클라이맥스’(Anti-Climax)에 가장 주목했다. ‘극적으로 갈등이 해결되어 절정이 기대되는 순간에 그 기대와는 달리 사소한 것에 의해 문제가 해결되는 상황을 말하는’ 이 용어는 ‘박찬욱식 엔딩’에 가장 걸맞는 표현인 듯하다. 2009년 개봉된 <박쥐>의 엔딩을 통해 이 용어를 대입해보자.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뱀파이어가 된 신부 상현(송강호)으로 하여금 욕망이 분출된 태주(김옥빈)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사랑을 하게 된다. 후반부에 이르면 두 사람의 생존에 대한 각기 다른 생각은 서로를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살인을 통한 생존을 하는 태주를 보며, 상현은 결단을 내린다. 이 결단이 바로 안티클라이맥스로 가는 과정이 된다. 상현은 욕망의 최고점을 찍는 태주의 행동을 저지한다. 상현은 태주를 데리고, 일출이 떠오르는 절벽 위로 향한다. 자동차를 제외하고는 숨을 곳이 없고, 태주와 상현은 삶의 연장선 앞에 결국 죽음을 선택한다. 상현의 이런 행동은 태주가 하는 살인을 저지하는 것을 넘어서 존재의 소멸로 이어지게 한다. 허무주의를 내포하는 박찬욱식 엔딩은 두 사람이 서로의 욕망에 방점을 찍는 것이 아니라 소멸을 통해 관객들을 환기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에 더해 그들이 죽음을 목전에 두고 바라본 피바다가 넘쳐흐르는 이미지를 관객들에게 제시한다. ‘이 방식이 내게는 좀 어색했던 영화 <박쥐>에서는 박찬욱의 예술가로서의 초자아가 유희적이고 전복적인 그의 스타일을 결박하고 있어서, 인간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기술한 에밀 졸라 원작을 신부의 존재론적 고뇌와 결합시키려 한 서사의 이질적 요소들이 끝까지 붙지 않고 아우성치는 가운데 그것이 박찬욱식 인장이라고 선포하는 느낌이었다.’ 라고 김영진 영화 평론가는 서술한다. 이를 시작으로 김영진은 <아가씨>에 대한 담론을 나눈다. ‘<아가씨>는 아주 잘 만든 강탈 범죄영화로 손색이 없으며 여자들의 욕망을 전면에 내세워 남자들의 성적 판타지를 지질하게 만든다. 여자들의 성욕(이라고 하지만 성적판타지)을 노골적으로 전시하면서 정치적 올바름을 선전하는, 한국적 상황에선 더 이상 경계를 더 헤집고 나갈 영역이 없어 보이는 대중영화다. 성공한 감독의 권력으로만 할 수 있는, 박찬욱 그 자신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웠을 거대한 세트를 장난감으로 갖고 놀면서 영화 작업 그 자체를 즐기는 가운데 대중의 기호를 충족시킬 지점을 찾아 적당히 놀래키고 여성들이 자기들끼리 즐기면서 이기는 판타지를 여성혐오가 만연하는 사회를 향해 제공한다는 대단한 미션을 박찬욱은 성취했다.’ 박찬욱이 성취한 것은 단순히 성적인 부분에 대한 묘사뿐일까. 그 부분에 대해 김소희 영화 평론가의 비평을 가져와 이야기를 더 나눠본다. 

 

▲ 아가씨(2016)  © ㈜모호필름, ㈜용필름

 

‘씨네21 [김소희의 영화비평] <아가씨> 이야기의 구조적 쾌락을 위해 소비되는 사랑’(2016.06.29.)에 실린 비평 기사는 <아가씨>의 ‘외피’에 집중한다. <아가씨>를 논할 때 자주 언급되는 단어는 퀴어, 여성, 연대 같은 것들이다. 나는 <아가씨>가 이 단어들과 관계가 옅을 뿐만 아니라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고 싶다. 이런 단어가 드러내는 가치는, 마치 영화가 가장하는 외피에 감싸인 진실인 양 추양한다. 그러나 <아가씨>는 외피가 싸고 있는 내용이 아니라 외피가 전부인 영화라고 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구조라고 바꿔 말해도 좋을 외피가 내용을 이해하는 방식을 교묘히 조종해, 결국 그 내용까지 바꿔놓기 때문이다.‘ 김소희가 말하는 외피의 내용이란 <아가씨>의 서사구조다.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와 숙희(김태리)의 관계는 연대를 통해서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조진웅)에게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가 아닌, 더 중요한 포인트는 ‘섹스’ 장면이라는 것. ‘<아가씨>를 읽는 가장 적절한 방식은 이것은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일 뿐임을 인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가씨>에서 3부로 나뉜 이야기 뭉텅이가 기존 박찬욱 영화 속 이미지의 기능을 대신하는 것으로 본다면, 우리가 서사와 이미지를 이해할 때 내레이션과 같은 언어에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가를 거꾸로 이해하게 된다. 이런 가능성을 인정한다 해도 2부를 거쳐 다시 1부를 곱씹어봤을 때 백작뿐만 아니라 나 역시 속았다는 사실 외에 뭐가 남는지 궁금하다. 더욱 나쁜 것은 숙희와 히데코가 이야기에서 빠져나간 영화의 결말이, 영화가 그리는 주제와 맞물려 인물들의 주체적인 행위인 것처럼 포장되고 오인된다는 사실이다.’ 김소희 영화 평론가는 숙희와 히데코가 정말 탈출했는가의 소제목을 붙여 질문을 던진다. 주체적인 행위로 탈출을 한 것이 맞는지. 그들의 탈출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외피적인 탈출 일뿐, 내피로서의 탈출은 아니라는 것. 총 3부로 구성된 이야기의 분절은 추진력과 연관이 있다. 1부가 히데코를 속이려 하는 일본 백작(하정우)과 숙희의 연합을 통해 넓은 저택으로 들어가서의 이야기를 그린다면, 2부에서는 히데코와 숙희의 화합을 그린다. 1부와 2부 사이의 틈에서 추진력을 얻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들의 정사씬이다. 이미지를 강조하는 그의 작품에서 여성의 몸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면서도 그만의 잔혹하면서 섬세한 폭력성도 내재시킨다. 그렇기에 앞서 김영진 영화 평론가가 말한 강탈 범죄영화라는 단어에 꼭 맞는 설명이다. 

 

기존의 비평가들은 <아가씨>의 서사구조 안의 정사에 주목했다. 하지만 이들이 말한 정사는 인물들의 감정을 드러내기에는 부족했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김영진 영화 평론가와 김소희 영화 평론가의 의견은 정사의 장면이 꼭 필요했던가.하는 부분이다. 혹은 그것이 그녀들의 감정을 다루기에 적절했던가에 대한 의문을 제시한다. 여성들의 연대는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일 뿐이라는 것. 나 역시도 김소희 평론가가 말했던 외피 안에 숨겨진 내피를 파헤치기보다 보여지는 것에 집중해 단순히 보는 것이 <아가씨>를 보는 또 하나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의 관계를 바라보는 요소에 또 하나의 의미가 존재할 것이라는 생각이 스친다. 나는 단순히 <아가씨>가 외피에만 주목할 만한 영화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아가씨>에서의 히데코와 숙희가 저택 너머로의 힘차게 달리기를 하는 것은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말인가. ‘안티클라이맥스’가 박찬욱식 엔딩이라는 것. 그것이 비평가들이 박찬욱을 평가하는 공통된 의견이라는 점에 나 또한 주목한다. <아가씨> 이전의 박찬욱이 지닌 ‘안티클라이맥스’를. 그렇다면 안티클라이맥스를 키워드로 앞서 말한 이야기들을 다르게 해석해본다면 어떨까. 기존의 비평가들의 의견을 토대로 <아가씨>를 새롭게 부검해본다. 

 

박찬욱식 영화 비틀기에 또 한번 비틀기 

 

박찬욱식 엔딩에 대한 다양한 단서들을 제시하며 부검을 시작한다. 가장 처음으로 주목해야 할 점은 서사의 진행방식이다. 김영진 영화평론가가 <아가씨>를 말하면서 다루었던 부분을 제시하며 살펴보도록 하자. ‘남자들의 억눌린 욕망의 수동태로서 행위하는 것에 익숙한 히데코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숙희의 자질은 유혹자로서의 자질이 아니라 보살피는 자로서의 자질에 가깝다. 그녀가 처음 소개될 때 버려진 아이들을 키워 내다 파는 빈민굴의 소굴에서 그녀는 갓난아기들을 보며 자신에게 젖이 나오지 않는 걸 안타까워한다. (...) 숙희는 남자들이 지배하는 말과 상상의 세계에서 자유롭고 무식한 하녀이자 그 때문에 지식으로 왜곡되지 않은 본능의 담지자로서 히데코를 구원한다.’ 여기서 중요한 키워드를 두 개로 분류해서 이야기해볼 수 있다. 첫 번째로 ‘모성애’와 두 번째로 ‘구원’이다. 기존의 비평도 이 두 가지 키워드에 대해 제시는 하지만 해석을 함에 있어서 다른 부분에 더 초점을 둔 부분이 존재한다. 기존의 텍스트를 선두에 제시하고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다시 한번 재감상해 본다. 새롭게 제시되는 포인트는 어디로 향하는 모성애인지와 누구로부터의 구원인가 하는 점이다. 

 

숙희의 모성애는 어디로 향하는가 

 

<아가씨>의 이야기 진행방식은 총 3부로 캐릭터의 교차된 시선으로 이어지다 결합된다. 마치 연극 무대에서의 막구조를 지닌 듯 한 이야기방식은 고전적이며 클래식하다. 이에 더불어 앞서 김영진 영화 평론가가 말한 강탈 범죄영화의 구성을 지닌다. 범죄영화에서 가장 주요하게 부각되어야 하는 부분은 심리묘사다. 긴장감을 고조하는 방식과 은밀한 속내를 읽을 수 있는 서사구조를 선택한 박찬욱의 이야기 묘사방식은 실로 탁월하다. 그렇다면 다시 말해 <아가씨>는 기존의 자신이 제작한 영화를 풀어내던 ‘비틀기’에서는 조금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복수 3부작 시리즈라고 불리는 박찬욱의 인장이 새겨진 작품들에서는 이미지의 비틀기를 통한 서사의 전개를 선택했다면, <아가씨>는 다른 방향의 비틀기를 선택했다. 캐릭터들의 관계를 통한 비틀기. <아가씨>의 주요인물은 숙희와 아가씨 히데코, 백작, 코우즈키 총 4명의 인물이다. 얽히고 설킨 관계는 이내 영화의 중심축이 되어 소용돌이를 불러일으킨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어떨까. 캐릭터들 또한 고전적인 방식을 차용한다. 누군가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숙희의 설정과 그에 대한 반항된 태도를 보이는 아가씨의 모습을 통해 일어난 충돌은 극의 묘한 긴장감을 더한다. <아가씨>의 이야기는 고전적 요소 중 어떤 부분을 담고 있는 것일까. 삼촌인 코우즈키에 의해 갇혀사는 아가씨 히데코. 그녀는 삼촌이 만든 음탕한 감옥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 온갖 서적들을 신사들 앞에서 읽으면서 살아간다. 그에 반해 그 공간으로 들어오게 되는 숙희. 그녀는 고아 출신으로 다른 고아 아이들을 돌보다가 백작의 선택으로 아가씨를 만나게 된다. 이렇게만 본다면 범죄영화가 가진 다른 세계로의 진입하는 식의 해석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가씨>는 그리스로마신화 속의 하데스와 페르세포네 그리고 페르세포네의 어머니 데메테르와 닮아있다. 페르세포네는 대지의 여신인 데메테르의 딸로 하데스에 의해 지하세계로 납치된다. 히데코가 삼촌인 코우즈키에 의해 살아가는 과정은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해 지하세계로 진입하는 과정과 유사하다. 그렇게 어둠 속의 나날들이 계속되지만, 데메테르는 딸을 잃은 슬픔에 그녀를 구출하기를 원한다. 페르세포네가 지하세계에서 나올 수 있는 조건은 지하세계의 음식을 하나도 먹지 않았어야 가능한 일. 하지만 그것을 미리 알고 있던 하데스는 페르세포네에게 포도알을 건넨다. 그렇게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에 발이 묶이게 된다. 이러한 이야기의 구조는 촘촘하게 아가씨 서사 안에 스며들어있다. 그렇다면 숙희의 존재는 무엇인가. 그에 대한 물음에 숙희는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화 속의 데메테르는 자신의 딸인 페르세포네를 지하세계에서 땅 위로 올라오게 하지 못한다. 숙희와 데메테르는 묘하게 어긋난다. <아가씨>의 오프닝으로 돌아가 숙희를 처음 보여주는 컷을 유심히 살펴보자. 아기를 안고 있는 숙희, 마치 아이들의 엄마인양 익숙하다.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려고 하지만 젖은 나오지 않는다. 마땅히 대지의 여신이라면 대지라고 상징될만한 아이들을 젖먹일 능력은 갖추고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숙희는 영화의 묘사처럼 ‘어리숙하다’ 이 문장은 숙희가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가 아닌 이를 동경하여 데메테르가 ‘되고 싶은’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춰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모성애’를 이야기 할 때, 흔히 ‘엄마’라는 단어의 키워드를 함께 가지고 와서 생각한다. 이제 고아들에게서 벗어나 숙희가 모성애를 느끼는 대상은 히데코다. 물론 이 모성애는 다양한 감정들이 혼합되어 섞인 감정이다. 때문에 이 영화를 퀴어와 여성영화로만 치부해서는 안되며, 그 범주에 있는 영화라고는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숙희와 히데코, 코우즈키의 관계는 그리스 로마신화를 닮았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넓은 저택을 뛰어넘어 도달한 곳은 어디이며, 누구로부터 구원이 된 걸까. 

 

▲ 아가씨(2016)  © ㈜모호필름, ㈜용필름

 

두 사람은 누구로부터 구원되었는가

 

3부의 엔딩을 보면, 히데코와 숙희는 안개가 짙게 깔린 배의 갑판 위에 서서 미소를 지어 보인다. 탈출에 성공하면서 자유를 얻는다. 하지만 약간의 찝찝한 부분이 남는다. 분명 두 사람은 완전한 자유를 얻었다. 일제강점기 시대가 선언하는 것에 대한 찝찝함일까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이 가는 여정이 행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측해서일까. 숙희에 의해서 히데코는 구원되었고, 히데코에 의해서 숙희도 구원되었다. 그렇다면 서로에 의한 구원이니 박수를 치면서 행복한 나날들을 상상하는 게 맞을 터인데. 히데코의 죽은 어머니도 탈출을 원했다. 죽은 이모도. 하지만 죽음을 통한 탈출만이 가능했을 뿐, 히데코처럼 물리적인 탈출을 하지는 못했다. 김소희 영화 평론가는 이렇게 제시한다. ’영화는 내용상 숙희와 히데코의 사랑과 연대를 그리고 있지만, 이들의 사랑은 이야기의 구조적 쾌락을 위해 소비된다. 숙희와 히데코가 이야기 속으로 사라지는 동안, 관객 역시 이야기 바깥으로 소외된다. 남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그저 하나의 이야기뿐일 수도 있다는 앙상한 가정이다.‘ 나는 이 가정에 어느 정도 동의한다. 두 사람의 구원은 박찬욱으로부터 시작된 이야기 속의 구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두 사람의 연대 과정이 생략되어 있는 과정은 범죄영화로서는 탁월했지만 두 사람의 감정을 그리는 과정에서는 부족했을지는 모른다. 감정이 응집된 정사씬이 그것을 채워주지만 세심한 감정을 그리기에는 조금 아쉬웠다는 느낌이 든다. 결국 관객들은 히데코와 숙희가 구원되었다고 믿을 테지만, 완전한 구원은 아니었음에 아쉬움을 보낼지도 모른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한 언급함에 있어서 이야기 내 두 사람의 내밀한 감정이 교차되었던 지점을 포착해야 한다. 그렇다면 물기가 묻은 카메라의 렌즈의 표면을 조심스레 닦아내어보자. 진실은 무엇일까. 두 사람이 서로에게 진실을 이야기하는 듯 거짓을 말하는 것이 영화의 전반적인 구조다. 하지만 그것을 깨내고 연대하는 부분은 3부에서 등장한다. 아니 2부의 아가씨의 시선에서 숙희의 시선과 일치하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관찰자의 시선이다. 그렇기에 은밀히 지켜보아야 한다. 숙희가 아가씨 히데코의 구두를 신어보고 옷을 입어보는 장면. 그 장면에서 감정의 뒤틀림은 시작된다. 단순히 하녀가 아니라 그 이상을 가진 숙희의 모습을 본 아가씨는 그때 생각할 것이다. 새로운 계획을 세워야겠다라고. 어리숙한 숙희의 모습은 히데코의 굳게 걸려버린 빗장과도 같은 감정에 틈을 준다. 그 틈으로 어느새 살포시 들어온 숙희는 히데코의 마음을 이리저리 헤집어 놓는다. 이때 구원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라기보다는 관계의 개선을 위한 종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이로 인해 서로에게 숨기던 감정들은 백작에게 히데코가 속지 않았으면 하는 숙희의 마음을 담고 숙희에게 시선이 가는 히데코의 모습으로 충돌한다. 충분히 두 사람의 감정을 보여주었지만 아쉬움이 남는다. 안티클라이맥스가 박찬욱식 엔딩에 인장이라고 한다면, 이 작품에서는 어디였을지 조금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 아가씨(2016)  © ㈜모호필름, ㈜용필름

 

비평의 맛 

 

앞서 기존의 비평가들이 제시한 단락에서의 두 개의 키워드를 가지고 왔다. 서사구조 안에서 숙희라는 캐릭터가 지닌 모성애와 숙희와 히데코의 구원에 관한 논의를 했던 부분을 확장시켰다. 숙희의 모성애가 어디로 향하는지와 두 사람은 누구로부터 구원이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를 서술했다. 비평의 과정은 순서를 다르게 배열하고 기존의 영역에서 시선을 비트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텍스트에 대한 관심은 과거에 비해 현저히 줄어들었다. 하나의 영상물을 보고 글로 이야기를 나누는 과정은 점차 사라지고, 그 과정에서 비평은 어두컴컴한 지하세계로 사라졌다. 한국 문단에서의 의의를 논하기에는 김영진, 김소희 영화 평론가가 논한 이야기의 근거와 시선이 냉철하기에 지금의 나의 비평은 새로운 것을 제시하며 환기한다고 보면 되겠다. 박찬욱의 신작 <헤어질 결심>이 크랭크 인을 거쳐 촬영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온다. 앞서 말한 박찬욱식 엔딩에 대한 기대감이 고조되면서 이번에는 어떤 식의 비틀기가 있을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며, 초반부의 작품에서 뒤로 갈수록 결이 미묘하게 바뀌는 감독의 시선이 어디에 닿을지 궁금해지는 부분이다. 고전의 작품들은 곱씹을수록 더 논의할 부분들이 많아지는 듯하다. 마치 차를 처음 우렸을 때와 그 이후의 맛들이 점점 달라지는 것처럼. 본질은 변화하지 않지만 그것을 음미하는 것은 다른 영화 비평은 그만의 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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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늘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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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2.03.02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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