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불만족 특집|01. 시각의 부재: 당신의 감각은 온전한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버드 박스’(2018)

최나윤 | 기사승인 2021/05/07

오감불만족 특집|01. 시각의 부재: 당신의 감각은 온전한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버드 박스’(2018)

최나윤 | 입력 : 2021/05/07 [10:00]

▲ '버드 박스' 스틸컷     ©넷플릭스

 

[씨네리와인드|최나윤 리뷰어] 감각이 통제된다는 사실은 불편함을 넘어 공포심을 불러일으킨다. 하나의 감각이 사라지면서 다른 감각들은 더 촉을 세우고 우리 몸은 긴장 상태에 들어간다. 영화 ‘버드 박스’는 기괴한 크리처를 시각화하는 대신 시각의 부재에서 오는 공포를 선택했다.

 

인간에게는 오감(五感)이 주어진다. 그 외에 우리가 갖지 못한 감각에 대해서는 알지도, 감히 짐작지도 못할뿐더러 애초에 그에 대한 불편함도 느끼지 못한다. 안타깝게도 ‘버드 박스’는 인간에게 너무나 익숙한 감각을 건드리며 온갖 불편함을 끌어모은다. 인간은 볼 수 있기 때문에 볼 수 없다는 막막함 또한 잘 알고 있다. 관객들은 제한된 시야로 정체 모를 크리처에 맞서는 인물들을 보며 가슴을 졸인다. 가끔은 그들의 시점이 되어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천에 답답함을 느끼기도 한다. 사용 가능한 감각을 억지로 차단한다는 것은 이토록 갑갑하다.

 

그러나 ‘버드 박스’의 진정한 공포는 완벽한 어둠이 아니다. 천 사이로 흘러오는 조금의 빛이다. 살고자 발버둥 치는 이들의 눈은 멀지 않았다. 다만 천으로 가리고 있을 뿐이다. 고로 그들에게는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눈을 가린 천은 언제든 풀릴 수 있다. 그 이유가 우연이 됐든 정신병자의 유혹이 됐든 간에 말이다. 자신이 원한다면 그 답답한 천을 직접 풀 수도 있다. 천뿐이랴. 인물들은 마켓에 갈 때도 자동차의 모든 창을 신문지로 가린 뒤 오직 내비게이션에만 의존하며 운전한다. 이 역시 언제 신문지가 벗겨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이처럼 관객들은 볼 수 없다는 것보다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긴장한다. 감각의 통제에 괴로워하면서도 그 감각이 제 역할을 할까 되레 걱정하는 이 딜레마가 ‘버드 박스’의 텐션을 쥐고 있는 끈이다.

 

▲ '버드 박스' 스틸컷     ©넷플릭스

 

영화에 대한 평은 특히 결말부에 이르러 갈린다. 긴장감을 유지해온 데 반해 결말의 힘이 부족하다는 아쉬움의 목소리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버드 박스’는 인류 멸망을 다룬 여타 영화들과는 다른 대안을 내놓는다. 명백한 인간의 승리도 파국도 아니다. 영화는 그동안 억눌러 온 시각을 해소시켜주기는커녕 아예 없애버리는 방향으로 진전된다. 맬러리가 보이와 걸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시각 장애인 학교였다. 볼 수 있다는 공포에서 완벽히 자유로운 사람들과 함께 그들은 전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이로써 인류는 갖고 있던 감각을 배제함으로써 삶을 영위하게 된다. 추가적인 획득은 물론이거니와 상실에 대한 대체품도 없으며, 그렇다고 완벽한 멸망도 아니다. 희망도 절망도 아닌 ‘감각의 포기’라는 이 찝찝한 결말은 그동안의 노고에 비해 시원치 못하다.

 

이처럼 ‘버드 박스’의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아예 시각이라는 감각을 배제한 세계를 준비하는 듯하다. 싱거운 결말을 곱씹을수록 뜻밖의 의문들이 생긴다. 인간에게 시각은 꼭 필요할까? 애초에 갖지 못한 감각이었더라면 이렇게 불편하지도 않았을 터. 그렇다면 인간은 갖고 있던 감각을 뺏긴 것일까? 혹시 애초에 인간이 가져서는 안 되는 감각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볼 수 있으나 봐서는 안 된다. 봐도 된다는 유혹이 들려오는 와중에 호기심도 난무한다. 이러한 설정은 선악과를 떠오르게 한다. 보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에서 눈은 선악과의 사과로 치환된다. 그들을 유혹하는 정신병자는 뱀이 되며, 사람들은 모두 아담과 이브와 같이 원죄의 심판대 앞에 섰다. 앞서 ‘인간은 가져서는 안 될 감각을 가졌던 것은 아닌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본다는 행위가 갖는 힘은 생각보다 강력하다. 인류는 그 철학적이고도 심오한 가치를 오래도록 인지하고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눈부터 ‘리어왕’의 글로스터의 눈, 그리고 ‘에쿠우스’ 속 말(馬)의 눈까지. 인간의 무지와 나약함에 대한 대가를 '눈'으로 치른다는 설정은 시각의 위력을 방증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우리는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익숙하고, 익숙한 만큼 자만한다. 시각의 축복에 길들어진 인간은 어리석게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 '에디푸스 왕'(1967)     © 자료사진

 

‘버드 박스’ 속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인간에게 과분한 그 감각을 다시 거두려 한다. 이 상황이 ‘무언가’의 계획이라고 가정해보자. 그것의 정체가 신인지 또 다른 초월적 존재인지 아니면 우주의 당연한 순리인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점은 그 무언가가 크리처를 통해 인간의 자만심을 비웃고 새로운 판을 짜려고 한다는 것이다.

 

늘 그랬듯, 인류는 방법을 찾았다. 그들은 역경을 뚫고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았다며 안심한다. 그러나 그마저도 갇혀 지내는 삶에 불과할 뿐이다. 인류는 여전히 거대한 박스 안에서 탈피하지 못했다. 상자에서 빠져나오니 또 다른 상자(시각 장애인 학교)가 기다리고 있던 맬러리의 새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시각의 과분함을 잊고 산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었는가. 또 그러한 감각이 통제된 인간은 얼마나 나약한가. ‘버드 박스’의 미적지근한 결말은 스릴 넘치는 과정과는 다른 결의 공포를 전달했다.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관점에서 맬러리와 두 아이의 관계를 살펴보자. 맬러리는 아이들에게 별다른 이름을 붙여주지 않는다. 그저 남자아이는 ‘보이’, 여자아이는 ‘걸’이라고 칭한다. 아이들이 이름을 갖게 되는 시점은 시각 장애인 학교에 도착한 후다. 갖은 수난을 겪으며 맬러리에게 없던 모성애가 생긴 것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들에게는 오히려 재앙 속에서 살아남은 인간들의 연대감이라는 범인류적인 차원의 사랑이 더 잘 어울린다. 걸과 보이는 새로운 세상의 보금자리에서 ‘올리비아’와 ‘톰’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다. ‘나’라는 존재를 자각한 뒤에야 나를 둘러싼 세상도 존재하게 되는 법이다. 그들은 이제 전혀 다른 환경 속에서 살아갈 것이다. 고로 맬러리가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한 것은 이전과는 완벽히 다른 인류를 알리는 총성이었다.

 

▲ '버드 박스' 스틸컷     ©넷플릭스

 

결국 ‘버드 박스’에서 제시한 포스트 아포칼립스는 어떤 세계인가. 바로 ‘정상’이 뒤집히는 세상이다. ‘버드 박스’에서 나오는 공동체들은 사회가 규정하는 정상과는 모두 거리가 있다. 맬러리와 톰, 그리고 두 아이는 다른 인종, 다른 핏줄이 만들어낸 가족이다. 시각 장애인들 역시 ‘정상’들의 사회에서 ‘정상’의 범주에 속하지 못하는 존재들이었다. 맨눈으로 크리처를 쳐다볼 수 있는 자들도 흔히 ‘정신병자’라 불리며 비정상적인 부류로 나뉘던 사람들이다. 영화는 계속해서 정상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 누가 되었건 간에, 스스로가 정한 얄팍한 규정 내에서 자신을 정상적이라고 칭하며 내심 위안에 젖어있지는 않았는지 돌아본다. ‘버드 박스’는 그러한 질문을 시각이라는 감각을 앞세워 이야기할 뿐, 여전히 인간은 여러 방면에서 나약하다. 자신이 어떤 상자에 갇혀 있는지, 애초에 갇혀 있다는 사실도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가기도 한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버드 박스’를 정상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하고 밖을 내다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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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나윤
씨네리와인드 객원취재부 기자단 5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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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05.0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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