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사과와 용서, 놓지 말아야 할 구원의 끈

'밀양'이 전세대에게 전하는 이야기

김채원 | 기사승인 2021/10/07

진실한 사과와 용서, 놓지 말아야 할 구원의 끈

'밀양'이 전세대에게 전하는 이야기

김채원 | 입력 : 2021/10/07 [10:58]

- 2021, 공기보다 가벼운 사과와 용서

 

▲ 영화 '밀양' 포스터  © (주)시네마서비스

 

 

[씨네리와인드|김채원 리뷰어] 진실한 사과와 용서, 그리고 구원은 무엇일까? 이는 어느새 우리 사회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이 되어버렸다. 오직 무성의한 사과와 미적지근한 용서, 께름칙한 구원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2021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사과할 상황이 아님에도, 쉬이 죄송합니다, 미안해 등의 말을 입에 담는다. 그렇게 가벼워진 언어의 무게는 용서, 구원이라는 일련의 과정에도 전염된다. 중요한 사과와 용서임에도 서로를 마주 보지 않고 휴대폰을 통해 전하는 일 또한 다반사다. 한껏 가벼워진 ‘죄송합니다.’와 ‘감사합니다.’를 말하고 들어도 우리는 정말 괜찮은 걸까? 쉽사리 전해지는 용서와 구원의 무게가 가벼워도 우리는 괜찮은 걸까? 답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우리가 답해야 하는 질문은 이런 진부한 질문이 아니라, ‘우리는 그동안 올바른 사과와 용서를 해온 것일까?’가 아닐까 싶다.

 

2007년 개봉한 이창동 감독의 전도연, 송강호 주연 영화 「밀양」 은 이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포스터로 하여금 평범한 로맨스물로 위장한 이 영화는 진실한 사과와 용서, 그리고 구원에 대한 심오한 이야기를 범죄와 기독교와 엮어 풀어내었다. 때문에 가끔은 범죄 영화, 반기독교 영화로 여겨지기도 하지만, 이는 영화 <밀양>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이창동 감독이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겨우 그런 뻔한 것들이 아니다. 이창동 감독은 약 15년이 흘러서도 유의미한 교훈을 전해주는 이야기를 한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다루는 이 영화는 조금은 지루하고 따분하게, 때로는 음울하고 침울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가 잊어버린 무언가를 전하는 영화 밀양의 진짜 뜻을, 우리는 꼭 알아야만 한다.

 

- 들어가기 전, 밀양은 무슨 내용?

 

영화 <밀양>은 남편과 사별한 신애(전도연 분)가 아들인 준과 함께 남편의 고향인 경상남도 밀양시로 이사를 가며 시작한다. 작은 피아노 학원을 개업한 신애는 카센터 직원인 종찬(송강호 분)을 시작으로 밀양의 사람들과 가까워지며 이웃이 되어간다. 준이의 유치원 원장선생님, 사춘기를 겪고 있는 원장 선생님의 딸,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약사 부부, 오지랖 넓은 양장점 주인들은 모두 조금 부담스럽지만 정이 많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신애는 여자 혼자 아이를 키운다는 사실에 은근한 무시와 동정을 받고 있었고 이에 자존심이 짓밟힌 신애는 학부모 회식 자리에서 유치원 원장에게 좋은 땅을 살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게 된다. 이 짧은 순간 때문에 비극은 발생한다. 신애의 재산이 탐났던 원장은 준이를 납치해 금전을 요구하고 준이를 잔인하게 살해한다. 이 일로 신애는 자신을 모든 일의 시작이라고 생각해 자학하며 준이의 환각을 보기도 하는 등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그러던 어느 날 신애는 종찬과 함께 교회에 가게 되고 거기서 얻은 배움으로 유치원 원장을 용서하고 신에게 구원받는다. 그렇게 신애는 큰 용기를 가지고 그를 직접 용서하고자 교도소로 향하지만 유치원 원장은 스스로 교도소에서 기독교의 배움을 얻어 자신은 이미 신에게 용서 받았고 또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신애는 알 수 없는 허탈감과 분노를 느끼며 밀양으로 돌아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교회의 큰 행사에서 우스꽝스러운 노래를 틀고 기도 모임을 가지는 가정집에 돌을 던지곤 한다. 심지어는 독실한 신자인 약사 부부를 더럽히고 싶어 성관계를 갖기도 하는 등 기행을 벌인다. 결국 끝없는 분노를 담아내지 못한 신애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고 시간이 흘러 종찬과 함께 밀양으로 다시 돌아온다. 하지만 처음으로 들어간 미용실에서 원장의 딸이 평범히 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고 다시금 차오르는 분노에 미용실을 박차고 나가 종찬이 들어주는 거울을 보고 신애 스스로 머리를 자르며 영화는 끝이 난다.

 

- 조금 께름칙한 밀양의 결말

 

위와 같이 영화 <밀양>은 비극적인 이야기를 담아내고 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인 신애의 잘린 머리카락들을 오랜 시간 보고 있자면 허탈감마저 든다. 무엇 때문일까? 이는 그 어떤 사건도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지 않은 채 결국 흘러가는 시간 속에 묻혀가는 듯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특히 특정 세 부분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 영화 '밀양' 스틸컷  © (주)시네마서비스

 

첫째, 미용실 장면으로 미루어 볼 때, 우리는 신애가 결국 원장을 용서하지 못했음을 충분히 추리할 수 있다. 하지만 원장은 그 누구의 용서도 필요 없이 스스로 신에게 용서받고 구원받으며 회개했다. 이는 신애에게 혹은 준이에게 있어 지독하리만큼 잔인한 결과이다. 원장의 회개로 인해 신애는 오히려 미쳤다는 소리를 들으며 기행을 저지르고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하게 되었는데도 이는 그 누구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살인자마저도 감싸 안는 신은 살인자가 죽였지만 죽이지 않은 신애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결국 신애 스스로 자신의 머리를 자르며 자신을 책임질 뿐이다.

 

▲ 영화 '밀양' 스틸컷  © (주)시네마서비스

 

둘째, 기독교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 또한 어떻게 처리하고 해소했는지 또한 언급되지 않는다. 그저 본인에게조차 보이지 않는 곳에 꾹꾹 눌러 담아 숨겨버린 것처럼 전혀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에 대한 신애의 감정은 후반부에 있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이를 이렇게 비가시화 한 것은 개인적으로 신애는 그 감정들을 해소하지 못했고 결국 자신에게서 숨기는데 급급했다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한다.

 

마지막으로, 정신병원에서 퇴원해 밀양으로 돌아오는 신애의 모습과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의 모습은 처연할 정도로 불안해 보여, 과연 그가 앞으로 괜찮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걱정된다. 신애의 곁에는 종찬과 이웃들이 함께하겠지만 그들은 영원한 타인일 뿐, 신애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저 그가 힘든 모습을 보일 때마다 위로하고 동정할 뿐이다.

 

우리에게 이런 불안감을 선사한 영화 <밀양>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이게 전부일까? 절대자도 법도 결국 피해자를 끝까지 책임져주지 않으니, 스스로 강해져서 모든 걸 이겨내라는 것일까? 당연히 아니다. 신애는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은 모두 원장과 그가 말하는 용서와 구원 속에 있다.

 

- 진실한 용서와 구원은 결국,

 

원장이 말하는 용서와 구원이 잘못된 이유는 그 용서와 구원은 객체(원장)만이 존재할 뿐, 주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원장을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신애가 그를 용서하기 위해 교회를 다니며 자신을 추스르고 있던 시간에 그는 신을 만나 스스로 절대자에게 용서받고 구원받았다. 이는 커다란 모순이지만, 몇몇 사람들은 그 모순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이는 우리가 평소 접하는 미디어 매체 속에서 기독교를 통한 수감자의 교화 및 구원이 긍정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다. 교도소 및 범죄자를 소재로 한 영화에서 기독교는 뻔질나게 등장한다. 이는 영화 <7번방의 선물>, <친절한 금자씨>,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등 유명 대중 매체들 속에서도 두드러진다. 기독교 신자들은 범죄자들에게 열심히 기도를 드리고 진심으로 반성한다면 하나님께서도 이를 용서하시고 당신을 구원해주실 것이라고 말한다. 원장도 분명 같은 수순을 밟았겠지만 영화 속에서 그런 묘사는 나오지 않는다. 피해자에게 있어 가해자의 서사는 걸리적거리는 장애물일 뿐이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점에 있어서 <밀양>은 정말 좋은 영화라고 자부한다. 작중에서 원장의 행보는 짧고 굵다. 이사 온 신애와 인사하고, 사춘기가 온 딸을 혼내고, 신애와 학부모 회식에 참여해 신애의 땅 이야기를 듣고, 준이를 죽이고 체포된 후 교도소에서 신애를 마주해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 준이를 죽이거나 체포되는 장면 등은 직접적으로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의 메인 빌런임을 고려한다면 매우 적은 출연임을 알 수 있다. 신애의 조력자인 종찬, 같은 교회 사람들보다 출연이 적어 얼굴이 흐릿할 정도이다. 하지만 피해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면 이런 방식이 전적으로 옳다. 우리가 굳이 범죄자의 모든 서사를 감상하고 그에게 정이 들어 그의 범죄와 수감을 슬프게 생각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이렇게 전개된 이야기이기 때문에 우리는 원장이 말한 용서와 구원을 어떤 방해물도 없이 똑바로 직면할 수 있게 된다.

 

여타 영화, 드라마 등과는 다르게 교도소에 수감된 원장이 말하는 용서와 구원은 선량하게만은 다가오지 않는다. 오히려 비겁하고 공허한 자기위로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 이유는 당연하게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인 신애가 한 용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신애는 그를 만나기 전까지 하나님을 통한 신앙심으로 그를 용서할 수 있었다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하지만 어쩌면 신애도 그 용서가 진짜 용서가 아님을 은연중에 알고 있었고, 때문에 그를 진짜로 용서하고 본인의 평안을 얻기 위해 교도소로 향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 신애는 원장이 말한 하나님의 용서와 구원이 모두 허상에 불과함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공허한 용서와 구원을 얻은 원장은 오히려 자신은 하나님의 은총이 있으니 신애의 용서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한다. 진짜로 용서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는 신애인데도 살인범마저 감싸 안는 허상의 하나님으로 인해 신애는 그 권리마저도 잃어버린다. 그리고 이로 인해 남모르게 드러난 진실은, 신애도 결국 그를 용서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종교의 뒤에 숨어 용서하고 용서받고, 구원하고 구원받는 것은 모두 본인이 편안해지기 위한 일종의 자기위로이자 자기세뇌 일뿐 결코 진심은 되지 못한다.

 

, 신애와 등장인물들을 비롯해 사람들은 아직도 용서라는 것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고 있다. 용서는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는 사람이 할 수 있을 때 혹은 하고 싶을 때 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또한 신이라는 절대자는 물론 타인이 대신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피해를 받은 사람과 피해를 준 사람 사이에 이루어지는 일대일 소통이어야 한다. 의미가 퇴색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고려해 당연히 중간에 개입하는 제삼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

 

이렇듯 용서라는 것은 피해자에게 있어 가해자를 마주한 채 과거를 돌아보아야만 하는 극심한 압박감을 이겨내는 강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본인이 편하기 위해서라도, 어차피 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기에 상대를 용서해야한다고 강요하곤 한다. 심지어는 절대자를 통해 용서 받고 구원 받은 이들에 대해서는 자신의 죄를 되돌아본 대단한 사람이라고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특히 이런 점은 교도소를 다녀온 신애에게 신애의 기도가 부족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약사부부의 장면에서 두드러진다. 이렇듯 잔인한 현실의 일면을 보여주는 영화 <밀양>은 영화를 감상한 모든 사람들에게 어느 샌가 퇴색되어 버린 용서와 구원의 진짜 의미와 잔인한 현실을 되새겨주고 있다. 타인이 행하는 용서는 무의미하며 현실은 가해자보다 피해자에게 각박하다는 것을.

 

- 2007년이 2021년에게,

 

▲ 영화 '밀양' 스틸컷  © (주)시네마서비스

 

밀양의 가장 유명한 대사는 신애의 어떻게 용서를 해요. 하나님이 용서를 하셨다는데.’이다. 이 대사는 오직 신애가 원장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만을 전달하고 있지만 신애의 체념, 허탈, 기독교에 대한 배신감 등 많은 감정들을 관객들에게 전한다. 또한 그간 신애가 신앙심으로 원장을 용서했던 과거가 얼마나 무의미했는지도 일깨운다. 하지만 신애가 끝끝내 원장을 용서하지 못했다는 암시를 통해 진짜 용서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지는 직접적으로 전하지 않는다. 이는 아마 이창동 감독이 진실한 용서의 방법에 대해서는 관객들 스스로 알아차리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닐까? 이미 이창동 감독은 영화 속에서 진실한 용서 방법의 반면교사를 제시했다. 영화 속에서 제시되는 절대자 등 제삼자를 통한 용서, 강요되는 용서, 가해자의 구원을 위한 용서를 통해 우리는 피해자와 가해자 두 사람 사이의 용서, 자발적인 용서, 피해자를 위한 용서가 옳다는 것을 이미 안다.

 

영화 속에서 강조되는 용서가 첫 번째와 세 번째의 용서라면, 개인적으로 강조하고 싶은 용서는 두 번째 용서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상대가 사과하니 용서하라는 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성장한다. 때문에 사람들은 은연중 자발적인 용서라도 결국 언젠가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전술했듯이 용서는 피해자가 정말 괜찮고 용서할 수 있는 용기가 생겼을 때 하는 것이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서도 용서할 수 없다면 용서하지 않는 것이 옳다.

 

영화 <밀양>은 오래된 영화이지만 2021년에 와서도 아주 유의미한 이야기를 전한다. 최근 SNS 상에서는 왕가위의 영화가 흥행하며 고전 is best라는 말이 유행한다. 낡은 필름에서 전해지는 아날로그적인 대사와 분위기가 상업영화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주는 듯하다. 밀양은 감성적인 영화도 담담하게 사랑의 언사를 전하는 영화도 아니지만 현실에 지친 사람들을 달래줄 수는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어 매우 중요한 용서에 대해서 진중하게 이야기하고 피해자에게 잔인한 현실을 일깨워준다. 영화 밀양은 회색도시에서 거짓 사과와 용서를 되풀이하는 현대인들에게 각성제가 될 수 있지 않을까? 2시간 남짓한 영화를 통해 차가운 사람들과 잔인한 현실이 변화하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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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채원
씨네리와인드 미디어본부 객원취재팀 기자단 6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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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osted 2021.10.07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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